6.25전쟁, 민족상잔의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다. 전쟁으로 생겨난 마을, 미군에 딸린 동네, 동두천은 태생부터 여느 도시와 달랐다.
전쟁 통에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사람들은 미군기지에서 나오는 찬반으로 끼니를 때웠고, 몇몇 사람들은 미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거나 미군들이 버린 물건을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자연스레 동두천으로 돈이 모였고 돈이 모이자 인구도 늘었다. 이담면은 1963년 동두천읍으로 승격됐고, 1981년에는 동두천시로 승격됐다.
한때 집집마다 달러가 뭉텅이로 있고,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황금시기를 보냈지만 동두천의 화려한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77년 미국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이 발표되자 도시는 전에 없이 술렁였고 사람들도 썰물 빠지듯 빠져나갔다. 이후에도 미군이 떠난다는 말이 수시로 나돌았고 그때마다 가슴 졸이며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아졌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글로벌 군사전략에 따라 미군 철수와 부대 이전이 이어지면서 한때 2만명에 가까웠던 미군수는 급감했고 지역경제는 그야말로 곤두박질쳤다. ‘배운 게 도둑질’인지라 미군을 상대로 한 장사 외에는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정든 고향을 등졌다.
세상이 바뀌는 동안 오로지 미군만 바라보던 동두천 경제는 한때 ‘돈두천’이라던 이름이 무색하게 지금은 경기도에서도 최하위 수준이다.
더구나 반세기 이상 동두천의 다른 이름은 ‘기지촌’이었다. 동두천에서 왔다 하면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차가운 시선에 예전부터 혼기 찬 처녀들은 타지역으로 시집가기가 쉽지 않았고,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가서도 제 이름을 대는 게 힘들었다.
1990년대 초반 동두천시와 양주군 통합논의가 불거져 나왔을 땐, 양주군 주민들이 반대해 결국 무산된 적도 있다. 명색이 시가 군에게 퇴짜를 맞은 셈이어서 동두천 시민들은 이때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혹자는 언제까지 미군에 기대어 살아갈 거냐는 비아냥도 서슴지 않는다. 그렇다면 70년간 이어온 안보와 희생이라는 명목하에 강요된 희생과 소외는 응당한 보상과 책임이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성장 뒤에는 동두천의 ‘특별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번 대선에서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자들이 내건 공약 또한 ‘특별한 희생에 대한 특별한 보답’이었다.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그동안 철저히 소외되어왔던, 오랜 세월 묵묵히 참고 견디어왔던 희생과 헌신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입을 모았다.
동두천 시민들은 응당 받을 만한 권리가 충분히 있다. 과연 그 약속들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허망이 흩어질지…값진 결실을 맺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나눠지어야 할 국가안보의 몫을 휴전선 인근의 작은 도시, 동두천이 온전히 짊어지고 온 대가는 너무도 가혹했다.
무엇보다 시 전체면적의 42%를 차지하는 미군 공여지는 지역발전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족쇄가 되어 번번이 발목을 잡았다. 특히나 미군 이전과 공여지 반환이 십수년째 지연되면서 도심이 공동화하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려던 당초 계획들도 무산되거나 변경이 불가피해졌다.
그래서 더욱 간절해졌고,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졌다. 동두천시가 GTX-C 노선 연장 같은 대규모 신규 사업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루한 겨울이 지나고 어느새 꽃피는 봄이 왔다. 나의 고향 동두천에도 이제 찾아올 봄날을 기대해본다.
미군에 빼앗긴 동두천 땅에도 봄은 올 테지. 과거의 오욕과 굴레를 벗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을 또다시 외면의 손길로 저버리지 말기를...
대한민국이 가는 공정한 성장의 길을 부디 함께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간절히 원하는 그 길을...
김희선 동두천시 공보전산과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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