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백두산 호랑이

밤이 낮처럼 환했다. 뺨을 스치는 하늬바람이 꽤 매웠다. 면도칼로 귓바퀴를 자르는 듯 아팠다. 벌거벗은 자작나무들 사이로 맹수 한 마리가 휙 하고 지나갔다. 건너편 숲으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눈앞에서 섬광이 번쩍거렸다.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인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琿春)을 찾았을 때 얘기다.

▶중국 교포 가이드가 북한 억양으로 그랬다. “녀석들의 친정은 장백산(백두산) 아닙니까. 겨울이면 이곳은 호랑이 천지가 아니겠습니까”. 격앙됐지만, 진지했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 아니겠습니까”. 말리지 않았다면 설명은 계속 될듯싶었다.

▶훈춘은 호랑이들의 제국이다. 이곳은 겨울이 유난히 길다. 그 혹독한 계절의 산하를 지배하는 맹수는 단연코 호랑이다. 녀석들은 백두산을 근거로 수천 년을 살아왔다. 생물학적으로 ‘백두산 호랑이’로 분류되는 개체다.

▶‘훈춘(琿春)’의 앞글자인 ‘훈(琿)’은 우르렁대는 호랑이 울음을 닮았다. 겨울잠을 자지 않는 짐승이어서 소생의 계절을 기다리는 게 아닐까. 봄이 기다려지는 까닭이다. 녀석들은 그렇게 질주하며 겨울을 보낸다. 아직도 그때의 포효(咆哮)가 귓전을 때린다.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외신에 따르면 훈춘의 야생 호랑이 개체수가 급증하고 있다. 이 고장에서 호랑이 출몰이 빈발하고 있다. 한낮에도 목격된다. 중국 포털사이트 바이두에는 새해 첫날 훈춘 들녘에서 촬영한 야생 새끼 호랑이 동영상이 올라왔다.

▶해당 동영상에는 새끼 호랑이가 달아나는 모습이 담겼다. 녀석은 달아나다 잠깐 멈춰 돌아본 뒤 다시 숲속으로 사라진다. 이튿날 낮 같은 지점에서 성체 호랑이와 만난다. 차가 지나가는 길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간 뒤 잠시 엎드려 응시하다 자취를 감춘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10월 훈춘을 포함해 지린성과 하이롱장성黑龍江省) 일대 1만4천100㎢를 백두산 호랑이와 표범 국가공원으로 지정했다. 지속적인 보호를 위해서다. 야생 호랑이는 지난 2017년 27마리에서 지난해말 50여마리로 늘었다. 전문가들은 개체수가 늘면서 근친교배로 생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호랑이해에 고구려의 영토를 달리는 호랑이 소식을 듣는 심정이 사뭇 자괴스럽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백두산 호랑이인데 말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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