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들어온 수감자가 귀엣말을 해준다. “빵 한 조각을 유리조각과 바꿔 털을 깎아. 그래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어. 노동력이 없어 보이면 가스실로 보내지거든. 그렇게 안 보이려면 그게 상책이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 남았던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의 일화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면도(面刀) 얘기다.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칼날이 지나갈 때마다 살갗이 따끔거린다. 그래서일까. 신경을 한껏 곤두세운다. 2~3분 정도다. 하지만 그 시간만큼은 평화다. 면도의 반전(反轉)이다. 남성들이 아침마다 치르는 의식은 그래서 늘 엄숙하다.
▶면도할 땐 면도용 거품을 먼저 얼굴에 바른다. 피부와 면도날과의 마찰력을 떨어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피부 자극과 상처 최소화를 위해서다. 면도용 거품도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다. 귀했던 시절도 있었다.
▶면도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18세기 후반 유럽이었다. 프랑스대혁명이 끝날 무렵이었다. 턱수염은 깎는 게 원칙이었다. 러시아 표트르 1세는 수염세도 부과했다. 금속제련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면도날은 거칠었다. 나폴레옹도 면도하다 피를 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세기 들어선 다시 수염 기르기가 유행이었다. 낭만주의 영향이었다. 카를 마르크스나 에이브러햄 링컨 등이 그랬다. 그러다 20세기 들어와 역전됐다. 그때부터 성인 남성은 매일 아침 면도하고, 매일 아침마다 베인다.
▶면도는 아침마다 해야 하는 위험한 곡예다. 항생제가 나오기 전에는 면도하다 베인 상처에 들어간 균으로 죽는 일도 있었다. 페니실린을 처음으로 주사, 치료를 시도한 대상자가 이런 경우였다. 페니실린 효과는 좋았지만, 양이 부족해 숨졌다. ‘면도 안 하기(No-Shave)’ 캠페인도 있었다.
▶전장(戰場)에서 병사들이 웃도리를 벗고 면도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 종군기자로 참전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망중한(忙中閑)이 그랬다. 전기면도기를 쓰면 베이지 않겠지만, 재래식 면도기가 더 좋다. 전기면도기를 사용하면 좀처럼 걱정과 잡념이 사라지지 않는다. 베일 필요가 없으니 집중하지도 않는다. 요즘처럼 하수상한 시절에는 면도라도 자주 하자. 그래서 세상의 온갖 텁텁함도 깔끔하게 깎아 버리자.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