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리쩌허우의 별세

숱한 청년들이 이념의 깃발 이름으로 동원됐다. 까까머리 소년들까지 그 흉측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의미 없는 선동 구호로 아침이 시작됐고, 패악질 투성이의 구호 속에서 하루가 저물었다. 사회는 모순과 왜곡 등이 들끓는 싸구려 저잣거리일 뿐이었다.

▶어떤 지식인이 이불 속에서 쓴 중국의 1970년대 서사(敍事)는 그랬다. 상식이 있다면 누구나 우울증 환자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당대는 한 마디로 ‘문화대혁명’이란 껍질을 뒤집어쓴 대혼란의 시대였다. 아무도 임금님의 당나귀 귀를 ‘당나귀 귀’라고 꼬집지 못했다. 모두가 병들었는데도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 같은 혼돈을 유일하게 지적한 이가 있었다, 중국 사상계의 거목 리쩌허우(李澤厚)였다. 그의 이름 앞에는 철학자와 미학자라는 호칭도 함께 붙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고향인 후난성(湖南省) 출신이지만, 정작 마오쩌둥으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1954년 베이징(北京)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1980년대 중국 청년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지식계에서의 영향력도 지대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10년 동안 허난성(河南省)으로 축출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이후 1970년 후반 대륙으로 불어온 개혁개방 속에 주요 저작을 펴내며 주목받았다. 1979년 펴낸 ‘중국근대사상사론’을 시작으로 1985년 ‘중국고대사상사론’도 출간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중국현대사상사론’도 햇빛을 받는다.

▶그는 조국과 또다시 맞붙는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였다. 횡포와 독선을 일삼는 정부에 쓴소리를 했다는 이유로 다시 암울한 시대를 맞는다. 그리고 미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한다. 미국에서 서양사상의 새로운 탈출구를 중국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 철학과 서양 철학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깊이 사유했다.

▶콜로라도대 등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 파리 국제철학원 종신회원이었고, 미국 콜로라도대 명예 인문학 박사였다. 그랬던 그가 3일(현지시각) 91세를 일기로 세상과 하직했다. 중국이 또 한 명의 소중한 스승을 잃었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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