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산누리 출신 이현경·선경 자매…일제 항거 대한독립 만세 외쳤다

(왼쪽부터) 이현경 선생/이선경 선생

“자주 독립 정신을 갖고 일제에 맞섰던 수원 지역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90여년 전 어린 나이에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수원 산누리(현 팔달구 교동 일원) 출신 이현경(1899~미상)ㆍ선경(1902~1921) 선생의 삶이 ‘학생독립운동기념일’(11월3일)을 맞아 재조명되고 있다.

2일 수원화성박물관에 따르면 이현경ㆍ선경 선생은 수원화성 안에서 대금업을 하던 이학구(1896년생)의 장녀와 차녀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유복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자국이 처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고난과 역경이 보란 듯이 예상되는 독립 투쟁의 길로 스스로 발을 담갔다.

언니 이현경 선생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21년 3ㆍ1운동 2주기를 맞아 도쿄 히비야 공원에서 140여명의 유학생들과 만세 운동을 하다 체포됐다.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항일여성단체인 근우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으며 1928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특히 이현경 선생은 경부선 기차 안에서 한 일본인 남성이 조선인을 상대로 욕을 하며 행패를 부리자 그의 뺨을 후려갈긴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동생 이선경 선생은 학생기록부에 ‘책임감이 강하다’고 기재될 정도로 주의 친구들을 잘 이끌며 리더십을 인정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숙명여학교 2학년생 시절 서울역에서 3ㆍ1운동에 참가했다가 구속됐다. 방면 후 꿈많은 10대 소녀였던 이선경 선생은 수원 최초의 학생비밀 결사조직인 ‘구국민단’에 가입, 독립신문 배포 등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간호부가 돼 독립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 꿈은 1920년 8월 일제 경찰의 체포로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 이선경 선생은 심문 과정에서 병을 얻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음에도 그의 성격상 책임감이 강해 입을 열지 않았다. 모진 고문에 이선경 선생은 결국 다음해 4월 석방돼 수원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순국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 관장은 “수원의 독립운동 특징은 옆집 누나, 형 등 보통사람들이 나선 민중의 궐기라는 점”이라며 “시민들이 이들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고 기억하는 등 지역 역사에 큰 관심을 뒀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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