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의 고사는 당나라 멸망 후 5대10국 시대를 다룬 ‘오대사(五代史)’ 왕언장전에 나오는 얘기다. 왕언장은 당애제(唐哀帝)를 폐하고 스스로 후량의 태조가 된 주전충의 부하 장수다. 그는 용장으로 100근이 넘는 2개의 철창을 회초리처럼 휘둘러서 왕철창(王鐵槍)이라 불렀다. 그가 국호를 후당으로 바꾼 진나라의 침공에 초토사(변란이 일어난 지방에 파견한 무관직)로 출전했으나 크게 패해 파면됐다. 이후 후당의 재침공으로 등용됐으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그의 용맹함을 아낀 후당 왕이 회유했지만 “아침에 양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진나라를 섬기는 일은 할 수 없소”라며 죽음을 택했다. 왕언장은 평소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豹死留皮 人死留名)”는 고사를 자주 인용했다. 세상에, 후대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죽어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동시에 두렵고 떨린다. 그 이름이 명예이거나 오명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더욱 그렇다. 이름 남기기에 집착한다면 본말이 전도돼 허명(虛名)을 좇는 것과 같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2일(한국시각)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올해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지 30년이 되는 뜻깊은 해”라며 한반도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지난 2018년 이후 세 번째다.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문 대통령이 그럼에도 ‘종전선언’의 화두를 다시 꺼냈다. 임기 마지막까지 종전선언 기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다.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는 “국군 최고통수권자의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책무는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만들고 지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이자 대상인 ‘북한’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국민이 화형을 당해도,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일방적 폭발을 당해도 아무 소리 하지 못한 정부다. 이런 마당에 종전선언은 너무 뜬금없다. 지난 4년간의 지독한 짝사랑에도 북한은 달라지지 않았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속담이 있다. 스스로 이름을 남기려 애쓸 때 보는 이는 안쓰럽다.
김창학 정치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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