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전어지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heohy@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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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楓石) 서유구 선생은 실학자다. 하지만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문신(文臣)으로만 알려진 탓이다. 홍문관 부제학과 수원부 유수 등을 역임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뜬금없이 풍석 선생을 거론한 까닭은 명쾌하다. 18세기 조선에는 상당히 많은 실학자가 있었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다.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당시 재야(在野) 선비들의 숱한 저서들이 이를 입증해준다. 컴퓨터가 있었다면 훨씬 더 체계적이었을 연구들도 수두룩했다.

▶모든 식자층이 성리학에만 천착하지만은 않았다. 서 양문명은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었다. 정조도 돋보기 안경을 썼던 시절이다. 실학은 수세기가 흐른 뒤 학문적 편의에 의해 붙여진 명칭일 뿐이다. 당시에는 실용주의 학풍으로 풍미(風靡) 됐었다. 바람에 초목이 쓰러지듯, 그 같은 학풍이 널리 사회에 퍼져 있었음이다.

▶풍석 선생은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과 그 의 형님이신 손암(巽庵) 정약전 선생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손암 선생이 흑산 도로 유배를 가 쓴 책이 ‘자산어보(玆山 魚譜)’다. 바닷물고기에 대한 섬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 근대적인 동식물분 류법이 적용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렇다면, 바닷물고기에 민물고기까지 포함된 기록은 없었을까. 풍석 선생의 ‘전 어지(佃漁志)’는 바닷고기에 민물고기까지 관찰한 내용으로 꾸려졌다. 그래서 의미가 더 크다. 책은 선생의 역작 ‘임원 경제지(林園經濟志)’에 포함됐다. 백과사전 격인 저서에는 물고기는 물론 그물과 어망, 통발, 낚시와 작살 등 어구(漁具)들도 수록됐다. 학문적 차원에서 보다 균형 잡힌 체계적인 어류학 저술이다.

▶서유구 선생의 실용적인 학풍은 정조가 설립한 학문연구기관인 규장각에 초계 문신으로 근무하면서 연마됐다. 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고, 여러 학문적인 경험도 공유했다. 규장각에는 제2, 제3의 서 유구 선생들이 숱했다. 그는 ‘전어지’ 서 문에 “민생은 군자(君子)가 백성을 위해 풍요로움을 제시해야 하는 영역”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았다.

▶최근 ‘전어지’ 한글 번역이 완간됐다. ‘자산어보’는 영화까지 만들어지는 등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전어지’는 그렇지 못해 늘어놓는 푸념이다. 실학의 외연도 이젠 더 넓힐 때가 되지 않았을까.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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