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있었다. 아날로그시대 이곳에서 프랑스 영화 한 편 정도는 봤겠다. 꼭 불문학도((佛文學徒)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당시 대학생들의 단골 데이트코스이기도 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운영하던 프랑스 문화원 얘기다. 경복궁 동문 건너편이었겠다. 지금도 있을까.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필자도 이곳에서 두자릿수가 넘는 프랑스 영화들을 봤었다. 그중에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연신 줄담배를 피우는 청년의 일그러진 얼굴. 영화는 그런 장면이 클로즈업되면서 시작됐었다. ‘네 멋대로 하라’였다.
▶이 영화는 1960년대 프랑스를 강타했던 영화운동이었던 누벨 바그(Nouvelle Vague)의 산물이었다. 영어로 ‘새로운 물결(New Wave)’이란 뜻의 이 운동은 프랑스는 물론 전 유럽으로 번져나갔다. 보수적이고 반동적이었던 당시의 영화산업에 대한 저항이었다. 필연적이고도 숙명적이었다.
▶‘네 멋대로 하라’에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장면은 또 있다. 코가 삐뚤어진 주연 배우의 명품 연기였다. 장 폴 벨몽도(Jean Paul Belmondo)였다. 대서양을 건너 미국을 대표했던 반항아 제임스 딘과는 다른 풍모를 지녔던 배우였다. 전형적인 미남형이 아니었기에 배우를 준비할 때 주인공 배역을 따내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외모는 전혀 장애물로 작용되지 않았다.
▶아마추어 권투선수로도 활동했던 그가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던 건 1958년이었다. 지방의 작은 연극무대의 단역이었던 젊은이가 장뤼크 고다르 감독의 눈에 띄면서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이후 그의 연기는 빛을 보기 시작했다.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알랭 레네, 루이 말, 장 피에르 멜 빌…. 1960년대를 풍미했던 누벨 바그 감독들의 작품에는 늘 그가 있었다. 40여년의 근사한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그랬던 장폴 벨몽드가 지난 6일 먼 세상으로 떠났다. 액션과 코미디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들었던 노배우의 필모그래피도 추억으로 남게 됐다. “삶의 일부였던 그가 세상을 떠나 삶이 산산이 부서진 느낌이다”. 그의 오랜 동료였던 배우 알랭 들롱의 조사(弔詞)가 귓가에 맴돈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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