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류(齧齒類)라는 종족이 있다. 한자로 설치(齧齒)는 ‘무는 이’, 곧 송곳니를 뜻한다. 쥐가 이에 해당된다. 녀석의 앞니는 송곳니다. 매일 날카롭게 자란다. 카피바라(Capybara)는 이 종족 중 몸집이 가장 크다. 물과 육지를 자유로이 오간다.
▶코로나19 4차 대유행에 가을장마까지 시작됐는데 생뚱맞게 뭔 설치류 타령이냐는 힐난이 쏟아질 만하겠다. 지구 반대편에서 카피바라의 습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고급 주택단지가 녀석들의 공격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외신이 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개발과 보존, 빈부격차 등의 논쟁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논쟁의 주무대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부 ‘노르델타’라고 불리는 고급 주택가다. 4만여명이 거주하는 이곳은 외부 주민들의 출입이 철저하게 제한되는 주택단지다. 주민들은 최근 카피바라떼의 잦은 출몰로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녀석들은 몸길이가 1m가 넘고 몸무게도 60㎏ 넘게 나간다. 하지만 온순하고 친화력도 좋은 편이다. 노르델타에 있는 카피바라들도 사람들을 공격하진 않는다. 문제는 반려견을 공격하거나 교통사고를 유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덩치 큰 녀석들이 줄지어 길을 건너가거나 집 마당까지 들어와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도 심심찮게 목격된다고 한다.
▶노르델타에는 400마리가량의 카피바라가 있다. 그런데 2023년에는 3천500마리로 불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주민들도 카피바라를 처음 봤을 때는 좋아했다.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번식해 정원과 반려동물에 문제를 일으키면서 ‘불편한 동거’를 거부하고 있다. 현지 언론들은 카피바라가 노르델타를 습격한 게 아니라 노르텔타가 카피바라 서식지인 늪지를 먼저 침입했다고 지적한다.
▶파라나강 습지 위에 지어진 노르델타는 지난 2000년 건설 당시부터 환경운동가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지난해 화재로 30만㏊가 넘는 파라나강 습지가 파괴되면서 카피바라 터전도 더욱 줄어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자연파괴와 빈부격차를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일각에선 우스갯소리로 카피바라를 계급투쟁의 선봉장으로 묘사하고 있다. 환경파괴로 대재앙이 우려되는 지역이 어디 이곳뿐이겠는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닌 것 같아 씁쓸하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