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전고개는 용인서도 외졌다. 양지면 평창리와 원삼면 좌항리를 잇는다. 원래는 ‘좌찬고개’였다. 조선 정종 때 무장(武將) 박포(朴苞)가 넘었다. 그때 벼슬이 좌찬성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일제강점기 때 좌전고개로 개명됐다. 그런 곳이 어디 좌전고개뿐일까.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3ㆍ1운동이 펼쳐졌다. 1919년 3월21일이었다. 용인 최초의 3ㆍ1운동이었다. 3월28~29일 1천여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고기리·동천리·풍덕천리로 이어졌다. 2천여명이 가세했다. 4월3일까지 이어졌고, 1만3천200여명이 참가했다. 35명이 순국했다. 140여명이 다쳤고, 500명 이상이 투옥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은 크게 두 흐름으로 나뉜다. 3ㆍ1운동과 무장투쟁이다. 3ㆍ1운동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물론 있다. 무장투쟁과 비교해 그렇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독립이든 혁명이든 숙성기를 거쳐야 한다. 곧바로 완성되지 않는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건 1776년이다. 이후 10여년간 독립전쟁이 이어졌다. 실제로 독립을 쟁취한 건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뒤였다. 프랑스 혁명도 마찬가지다. 1789년 왕정이 타도됐지만,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에 즉위했다. 혁명이 완료된 건 30여년이 지나서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건 3ㆍ1운동이 일어난 해 7월이었다. 단순한 만세운동이 아니었다. 30여년 동안의 독립투쟁을 알리는 깃발이 올려진 것이다. 3ㆍ1운동이 없었다면 독립운동도 없었다. 그게 올곧은 역사의 흐름이다.
▶이처럼 용인지역 첫 3ㆍ1운동이 펼쳐졌던 원삼면 좌항리에 2024년까지 항일독립기념관 건립이 추진(본보 12일자 11면)된다. 원삼면 좌항리 산 21-1 ‘3·1 만세운동 기념공원’ 내 연면적 800㎡, 지상 2층 등의 규모로 지어진다. 지역의 독립운동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항일운동을 교육하고 체험하는 곳으로 활용된다.
▶기념관 명칭에 ‘일본에 항거했다’는 뜻의 ‘항일(抗日)’이 들어간다.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표현이다. 무릇 3ㆍ1운동이 일제에 맞선 독립전쟁으로 계승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구촌 어디에 내놓아도 늠름한 우리의 유산이다. 초복이 지난 오뉴월에도 3ㆍ1운동만 생각하면 시원해지는 까닭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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