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봉건제(Feudalism)를 채택하지 않았다. 영주(領主)로부터 토지(봉토)를 받고 행정을 펼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조선은 과거를 통해 관리들을 뽑아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
▶조선이 중앙집권제 국가였음을 입증해주는 단서는 따로 있다. 공물(貢物)제도다. 지방 수령들은 매년 지역 특산물을 중앙으로 올려 보냈다. 공물은 오늘날 지방세다. 지방 수령들은 이 제도로 골치가 아팠다. 중간과정도 불투명했다. 비리(非理)도 다반사였다. 집권층은 고심했다. 대동법(大同法)은 그런 와중에 나왔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재정은 극도로 어려웠다. 나라의 곳간은 텅 비었다. 한 지방 수령이 조정에 공물을 쌀로 통일하자고 건의했다. 충청도 관찰사인 잠곡(潛谷) 김육(金堉)이었다. 강산이 한번 바뀐 효종 2년(1651년) 충청지역에서 처음 시행된다.
▶전국으로 확산된 건 반세기가 훌쩍 지난 숙종 35년(1798년) 때였다. 앞서 1세기 전 처음 태동됐다. 임진왜란 발발 전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처음 주창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정책으로는 반영되진 않았다. 그러다 김육이 충청관찰사를 하면서 재차 건의하기에 이른다. 1세기만에 국가의 세금징수 시스템이 바뀐 셈이다.
▶평택 소사동에 대동법 시행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졌다. 효종 10년(1659년) 때였다. 김육이 충청관찰사로 부임했던 시기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다. 정확한 위치는 평택시 소사동 140-1번지다. 원래는 이곳에서 수백m 떨어진, 충청도로 통하는 길목에 세워졌다가 현 위치로 옮겨졌다. 1970년대였다.
▶대동법은 당시로선 세무행정의 혁신이었다. 오늘날 버전으로 표현하면 공정경제의 신호탄이다. 이 업무를 담당하던 공인(貢人)들은 조선 후기 산업자본가로 성장한다. 수공업과 상업 발달로도 이어졌다. 화폐유통과 운송활동 등도 늘었다. 대동법은 곧 조선판 산업혁명의 촉진제였다.
▶평택시 소사동 대동법 시행기념비 주변에 역사공원이 조성된다고 한다. 평택시는 10월 경기도문화재위 심의를 거쳐 확정한 뒤 설계를 시작한다는 방침이다. 역사공원 조성에만 그친다면 절반의 성공일뿐이다. 대동법과 조선시대 경제와의 명쾌한 함수관계가 간과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