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에 아잔이 울려 퍼지면 무슬림은 이마를 땅에 대고 신에게 간구한다. “우리의 평화와 기도에 힘을 보태소서!” 예배와 기도는 하루 다섯 번 반복되는 그들의 의무다. 종교 의무를 일상에서 실천하기에 그들은 사뭇 경건하다. 뜨거운 모래 위 세찬 바람에도 큰 눈만 껌벅거리는 그들의 낙타와 닮았다.
할례 후 무슬림에게는 어른 됨의 상징으로 잠비야가 주어진다. 잠비야는 허리춤에 휴대하는 짧은 칼이다. 한데 이 칼이 폭력성의 상징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외진 곳을 다녀야 하기에 맹수의 위협이 있다. 또 도적의 위협도 있다. 하여 잠비야는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방비일 뿐이다.
폭력성에 대한 오해는 지하드에서 절정에 이른다. 지하드는 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전쟁이다. 원래 살인은 신의 명령으로 금지돼 있다. 단 동료애를 중시하기에 형제가 살해당했을 때 반드시 복수하라고 명하고 있을 뿐이다.
무슬림은 작은 일에도 만족하며 신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손님을 신의 선물로 생각해 늘 환대한다. 특히 돈은 이웃과 나누는 것이라며 수입 중 사십분의 일을 자카트로 바친다. 또 수시로 재물을 희사하는 사다카도 행한다. 곤한 처지에도 이웃과 더불어 평화롭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다.
한남동 모스크에 아잔이 울려 퍼진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또 그들의 종교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됐을까. 필자의 경우 청마 그리고 서영은의 문학을 통해 겨우 그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해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生命의 書, 1938), 운명처럼 나를 대면하는 아라비아 사막. 본연의 나를 구하는 신의 땅이었다. 청마의 안내로 첫발을 디뎠던 아라비아는 그저 신비롭기만 했다.
석유로 넘쳐나는 돈의 유혹도 뿌리치고 조상 대대로 이어온 푸른 물길을 찾고자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가는 유목민. 내 안의 낙타를 끌어내어 참 자기를 구하려는 그들(먼 그대, 1983). 무소유의 삶이 탁월한 그들. 암울했던 1980년대 한 노처녀로 분한 서영은이 무슬림을 고행의 구도자로 귀띔해 주었다.
청마와 서영은, 두 선배의 소개로 만난 아라비아의 이슬람, 그들은 지혜로운 동시대인으로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한데 최근 그들에 대한 불순한 선동이 요란하다. 자기 신만을 맹신하는 배타적 이교도, 우리 전통을 훼손하는 불온한 패악세력, 노동 시장을 교란하는 탐욕스런 이주노동자 등으로 몰이하고 있다. 특히 한 줌 무장단체인 다에시와 연관시키는 악의적 의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잔인하게 각인된 다에시의 테러를 연상케 함으로써 순박한 그들 모두를 악마화하는 회상 용이성의 오류다.
이슬람, 낯설다고 온당하지 않게 여기는 것, 지독한 야만은 아닐까. 부당한 야만을 경계해야 한다. 그리하여 올바른 인식을,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
이계존 수원여자대학교 사회복지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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