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은 다소곳했다. 땅 밑에선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바람도 날렵했다. 종다리 여러 마리가 호루라기처럼 날아올랐다. 초등학교 뒤편으로 펼쳐진 땅들도 그랬다. 시흥시 미산동ㆍ매화동ㆍ은행동 등지에 걸쳐진 호조벌이라고 불리는 곳의 3월 하순 풍광이다.
▶수백년 전 이곳에선 바닷물을 막는 간척공사가 펼쳐졌었다. 백성들은 개펄에서 쉴 새 없이 흙을 파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제방을 만들어 다져진 땅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금기가 가신 옥토로 변했을 터이다. 지금도 땅에 코를 들이대면 그때 일꾼들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던 땀 냄새가 풍긴다. 아련하다.
▶김을 매다 허리를 펴면 북쪽으로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탄 배가 닿았다는 소래산이 한눈에 들어 왔을 것이다. 백제를 멸하기 위해 이 땅을 찾았던 소정방에게 한두 번쯤은 눈도 흘겼을 터이다. 서남쪽으로는 군자봉이 내려다 보고 있다. 동쪽을 제외하곤 온통 뫼뿐이다.
▶호조벌이라는 간척지는 농민들에게 경작지로 제공되진 않았을 터이다. 집권세력ㆍ토호세력이 독자지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소작으로 근근이 땅을 부쳤을 터이다. 당시 뺏고 빼앗기던 처절했던 수탈의 역사도 녹여져 있다.
▶호조벌은 시흥의 보통천과 은행천을 끼고 만들어졌다. 한양 인근의 제법 비옥했던 평야였다. ‘호조벌’이란 지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인천과 안산 사이에 옛날 호조가 만든 수백석이 나오는 방죽 논이 있다”고 기록됐다. 그 간척공사를 벌였던 관청이 재무를 담당했던 호조(戶曹) 산하 진휼청(賑恤廳)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조’가 조성한 ‘벌’이라는 뜻으로 오늘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첫 공사는 1721년 경종 1년 때였다.
▶중요한 건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18세기 초반에 벌써 바다를 막는 근대적인 간척공사가 이뤄졌다는 점이다. 호조벌의 넓이는 4.96㎢다. 시흥지역 최대의 곡창지대다. 지역 특산미인 ‘햇토미’도 여기서 생산되고 있다. 올해가 호조벌을 개간한지 300주년이다. 시흥시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흥문화원과 농민단체 등과 손잡고 오는 10월까지 다양한 기념행사를 펼친다. 코로나19로 제약을 받겠지만 땀을 흘렸던 농민들의 노고와 아픔도 마땅히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