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역사의 한가운데서

이스라엘에 가면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자제한다. 제물로 바쳐져 새카맣게 타 죽은 동물을 의미하는 그 용어를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유대인은 제물이 아니었고, 정치적 박해의 대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엄밀하게는 반인륜적인 한 인간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자행된 만행의 피해자인 것이다.

독일인들도 이스라엘에 가거나, 이스라엘 인사들과 대화할 때면 홀로코스트란 말보다는 쇼아(Shoah)라는 용어를 쓴다.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대학살, 예기치 못한 대재앙이란 의미가 담긴 ‘쇼아’를 언급하면서 독일인들은 한때 잘못된 역사 앞에 가슴에서 스며 나오는 고개 숙임을 한다.

독일 지도자들의 진지한 사과와 성찰을 이스라엘인들은 잘 받아들인다. 재통일을 이룬 지금의 독일인들도 현재 자신들의 과오가 아닌 나치시대 사람들의 죄과를 가지고 역사적 고뇌가 담긴 사죄의 말을 건네는 것이다. 독일인들의 진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잘 느끼고 있다. EU의 중심이 되어 있는 강국 독일의 태도를 유대인들은 제대로 감득하고 있다. 피해자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용서하느냐가 중요하다. 역사를 직시하는, 양심이 있는 독일인들은 아우슈비츠에 가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와 이스라엘을 자주 방문해 온 앙겔라 메르켈 만이 아니다.

그러나 추모석에 새겨진 희생자들의 이름은 마음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독일인들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방문하거나 특별한 추념의 자리에서 피해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절절히 노력하는 모습을 간간이 읽을 수 있다. 문제는 마음이다.

예루살렘에 소재한 ‘야드 바셈’에는 어린이 희생자 추모공간이 잠시 전율의 시간을 불러온다. 150만명 아동들의 영혼이 그 어둡고 어두운 동굴 속에 단 3개의 촛불이 뿜어내는 희미하고도 희미한 빛으로 살아 있다. 시리고도 시린 푸른빛의 동굴을 걸어 나오면서 인간의 광기가 빚어내는 가증스러운 비극의 단면을 슬픈 눈으로 느끼게 된다. 동굴을 벗어나면 갑자기 쏟아지는 하얀 햇살에 질식한다. 빛과 어둠에 질식하고, 전쟁의 광란과 평화의 온기 사이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운명의 철문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실존에 대해 회의한다. 독일인은 국가 이성으로 회의하고, 성찰하고, 진지하게 다짐한다. NEVER AGAIN.

앙겔라 메르켈은 자신의 인생 전반부에 관해 잘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구동독의 암흑기에 관해 상기하고 싶은 기분이 아닐 것이다. 광기조차 부재했던 그 시기에 그녀는 물리학 실험실에서도, 드레스덴 길거리에서도 자유를 갈망했고, 독일 총리로 네 번째 연임하고 있는 지금도 진정한 자유를 위한 고찰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어떤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아야 할까. 개화된 국가 이성이 아쉽다. 역저 <승리의 영광과 비참>을 남긴 프랑스 수상 조르쥬 클레망소의 고뇌의 시간이 다시 진지하게 다가온다.

최승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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