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불난 끝은 있어도 홍수난 끝은 없다’고 했다. 모든 것을 싹 쓸어 가기 때문이다. 올 장마는 긴 데다 무섭기까지 하다. 연일 전국 곳곳에 집중호우를 뿌리고 있다. 피해가 컸던 부산만 봐도 한번 뿌리면 인정사정없이 ‘물 폭탄’이다. 수도권과 중부지방엔 지난 주말부터 이어진 집중호우로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인명 피해만도 4일 오전 기준 13명이 숨지고 13명이 실종됐다. 가평에선 토사가 펜션을 덮쳐 주인 일가족 3명이 숨졌다. 외국서 일하던 딸이 귀국해 출산 후 어머니의 일을 돕다 변을 당해 안타까움을 샀다.
▶1996년 7월 26일부터 사흘간 경기북부에 폭우가 쏟아졌다. 전방지대라 군부대에 큰 피해를 안겼다. 군부대가 자리한 곳이 대체로 산골짜기 쪽이어서 막사가 산사태로 묻히는 참사가 속출했다. 사망·실종된 군인 수만 60여 명에 달하면서 가족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아픔을 남겼다. 특히 한탄강 하류에 있던 연천댐이 붕괴되면서 임진강 하류 저지대인 문산은 3m 깊이로 물에 잠겨버렸다. 시가지 대부분이 초토화됐다. 문산은 1998년과 1999년에도 홍수로 물바다가 됐다. 시가지가 저지대인 탓에 되풀이된 사고였다.
▶장마는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 다세대 주택 반지하가 대표적이다. 한국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상 수상의 영광을 안긴 ‘기생충’에도 주인공이 사는 반지하 주택이 폭우에 물바다가 되는 광경이 나온다. 주인공 가족의 반지하 집엔 허리 높이만큼 물이 차고 온갖 오물들로 가득 찬다. 반지하 집은 지면보다 낮게 자리하고 있어 내리는 비와 역류하는 오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전국적으로 25만 8천 가구가 반지하 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에게 장마는 두려운 존재다.
▶올해 장마는 유독 길게 이어지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제주는 지난 6월 10일 장마에 들어 7월 28일까지 49일간 이어졌다. 역대 최장 기록이다. 남부지방은 6월 24일부터 7월 31일까지 38일간 계속됐다. 남부지방에서 장마가 가장 길었던 해는 2014년으로 46일간이다. 중부지방은 4일 현재 42일째인데도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2013년 49일간의 장마로 역대 최장기간이란 기록을 갖고 있지만 이를 넘어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올해 장맛비는 국지적으로 강하게 내리는 특성이 있어 방심할 수 없다.
▶황규관 시인은 최근 한 칼럼에서 장마와 관련한 아픈 기억을 더듬었다. 일곱 살 무렵 장맛비에 전주천이 불었을 때 떠내려오는 돼지도 보았고 부서진 오두막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전주천은 다섯 살 때 동생을 삼킨 곳이라고도 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오열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밤새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빗소리에 밤잠을 설쳤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군가에겐 아픔으로 남았음이다. 시인은 “올 장마는 남몰래 울어도 들키지 않을 만큼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시인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 장마가 야속하기만 하다.
박정임 미디어본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