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뛰어 넘어 추사와 만남… 난세에 길을 묻다
이 시대에 우리가 추사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코로나 19라는 바이러스를 만나면서 사람들은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태계를 파괴하고 과소비하며 성장과 속도만을 외친다면 인류의 장래를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어수선하고 답답한 시절 탓인지 자신에게 닥친 고난을 헤치며 뜨겁게 이 땅을 살다간 위대한 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1786~1846)의 삶과 예술을 가슴으로 만나고 싶었다.
■ 추사를 만나는 법
추사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서면 2층 중앙 벽면에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도’라는 난초 그림 벽화를 볼 수 있다. 멋진 난초 그림을 살펴보면서, 제주도 유배 시절에 스승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고 청나라의 신간 서적을 꾸준히 보내준 제자 이상적에게 선물한 ‘세한도’를 떠올렸다. 학창시절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세한도에 얽힌 애틋한 사연과 그림에 대한 찬사를 들었으나 왜 저 그림이 그토록 유명한지, 왜 국보로 지정되었는지를 솔직히 이해하지 못했다.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한국회화와 서예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추사의 그림과 글씨는 안평대군이나 석봉 한호의 글씨, 겸재 정선이나 단원 김홍도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르다. 마치 고흐의 ‘자화상’을 보다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볼 때처럼 낯설다. 그런 추사를 만나려면 약간의 여유와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추사박물관을 돌아보며 새삼 깨달았다.
추사 김정희라는 천재 예술가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소개하는 공간이 과천 주암동에 자리한 과천시 추사박물관이다. 추사 김정희가 19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학자이자 빼어난 예술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역사 시간에 등장하는 추사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고 해독한 금석학의 대가이며,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라는 글로 대표되는 실학의 종장이다. 이런 까닭에 박물관에 전시된 것은 그의 글씨와 책이 대부분이다.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같은 유명한 그림도 있지만 몇 작품에 불과하다. 추사의 그림은 ‘추사체’로 불리는 그의 글씨에 비한다면 그래도 접근이 쉬운 편이다. 그러니 눈앞에 있는 추사의 작품을 보고도 감동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어린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나이 든 성인들의 감각은 더 무디고 어둡다. 추사를 연구하는 전문가를 빼고 박물관에 있는 글씨를 줄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면 추사는 ‘너무나 먼 당신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잘 모르는 한자를 애써 읽으려 하지 말고 그림을 보듯 글씨의 구도를 뜯어보며 느낌대로 감상하라는 것이 추사전문가가 권하는 방법이다. 여유와 시간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아야 추사를 만날 수 있다.
■ 왜 과천일까?
그런데 왜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있을까? “과천은 추사 김정희 선생 집안의 별장인 과지초당(瓜地草堂)이 있던 곳입니다. 아버지 김노경의 묘가 있었던 곳이고 추사가 말년 4년간을 살았던 곳이지요. 2006년에 추사를 연구하며 관련 자료를 모은 일본 학자 후지츠카 치카시의 아들 아키나오 선생이 이 관련자료 전부를 과천시에 기증하면서 추사박물관이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사는 과천의 과지초당에서 돌아가셨지요. 예술가에게 말년은 자신의 예술혼을 잘 드러내 주는 시기입니다. 이를 미술사에서는 ‘말년 양식’이라고 하지요. 과천은 추사가 생애 말년을 보내면서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 곳입니다. 과천에서 가까운 강남의 봉은사 ‘판전(版殿)’도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쓰신 최후의 작품이죠.” 박물관을 안내하는 허홍범 학예사의 설명을 들으니 왜 과천에 추사박물관이 세워졌는지 절로 이해가 갔다. 추사의 글씨는 매우 파격적이고 혁신적이다. 추사의 창조성은 근거가 있는 창조성이다. 이를 당대 사람들조차 이해를 못 해 ‘괴이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추사의 글씨를 이렇게 평하는 까닭은 글씨의 뿌리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이다.
“상형문자인 한자는 동물이나 사물, 신체의 모습을 본뜬 문자로 학교에서 배웠듯이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다섯 가지 서체가 있지요. 여기에 추사는 글씨의 원류를 예서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니까 중국 고대 한나라의 비석이나 구리거울 등에 쓰여진 예서글씨의 강한 미감을 추구한 결과 이런 창조에 도달하게 된 것이랍니다.”
■ 한국 서예사의 꽃, 추사체의 탄생
추사는 글씨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조맹부(송설체), 소동파, 안진경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중국 고대의 한나라와 남북조시대의 여러 금석문을 익히다가 예서체가 서예의 근본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과 부단한 노력으로 완성된 추사의 글씨는 서예가 발달한 중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추사의 예서글씨를 특히 높이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공간적 구성이 완벽하다는 점과 한 화면 안에 직선과 곡선, 획의 굵기와 가늘기 등이 조화롭게 배치되었다는 점이지요.” 추사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인 것 같다.
나도 전문가에게 배운 대로 앞으로 추사박물관을 방문하게 될 관람객에게 권한다. “마음을 끄는 추사의 글씨 앞에 서서 글씨를 한 자씩 한참 바라보세요. 글씨에서 수직과 수평, 사선, 굵은 획과 가는 획이 적절히 구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체의 공간 구성이 탁월하고 새롭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추사에 빠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추사는 돌이나 쇠 같은 금석기가 강한 글씨를 선호했다. 공간경영의 완벽함을 서예에서는 ‘포치(布置)’라고 하는데, 파격적이고 창조적인 추사의 서체는 글씨의 본질을 완벽히 이해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 디자이너가 가장 좋아하는 글씨 또한 추사체다. 화가와 조각가 중에도 추사에 빠진 작가들이 적지 않다.
■ 박물관의 구성
추사박물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이다. 2층은 추사의 생애 전시실이고,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가면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추사의 학예 전시실이 나온다. 지하 1층은 추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지츠카 기증실과 상설체험실, 기획전시실, 교육실과 세미나실이 있다. 관람은 2층 ‘추사의 생애실’부터 시작한다. 추사의 소년 시절에 쓴 편지부터 24살 때 부친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 머물며 옹방강과 완원 같은 학자들 만나 배움을 청했던 연행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을 지낸 한양시절, 억울한 누명을 쓰고 8년 3개월간 제주도에서 보낸 유배 시절, 노량진에 머물던 강상(江上)시절, 1년여의 함경도 북청에서의 유배 시절, 생애 마지막 4년을 보낸 과천시절 순으로 관람할 수 있다.
추사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더 즐겁고 유익하게 관람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학예사는 이렇게 당부한다. “어느 박물관 미술관을 가더라도 꼭 두 번씩 보세요. 먼저 해당 박물관 미술관의 건물구조나 전시작품을 전체적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작품을 이어서 보되 자기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나면 좀 오래 보는 게 좋습니다. 그 작품이 추사의 ‘계산무진(谿山無盡)’ 같은 유명작품일 수도 있지만, 소품인 경우도 있고, 패널의 설명문 한 구절일 수도 있습니다. 관람은 예술가의 작품과 관람자인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 추사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추사박물관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이 풍성하다. 유치원부터 초등생이나 중고생은 물론 일반인을 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다. ‘추사의 벗, 문방사우’ ‘두근두근 나도 암행어사’ ‘조선명필, 추사를 만나다’ ‘추사박물관 탐험대’ ‘과천문화재탐방’ ‘꼭꼭 닫힌 과지초당의 문을 열어라’ ‘옛날옛날 추사의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 ‘추사박물관 붓놀이터’ ‘조선의 선비, 추사의 하루’ …. 추사박물관이 시민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서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전철로 이용하려면, 사당이나 과천 쪽은 선바위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6번 버스를 타면 되고 양재 쪽은 양재역 9번 출구에서 6번 버스를 타면 된다.
박물관을 나서기 전에 방문객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를 물었다. “추사 선생님이 오늘날 계속 얘기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핵심은 창조성입니다. 큰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추사 선생님의 창조적인 예술정신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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