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인공 최서희는 김길상과 결혼, 두 아들을 낳아 최환국, 최윤국으로 이름 지었다. 가부장제가 엄격했던 일제강점기에 자녀에게 아버지 대신 어머니 성을 물려주는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서희는 서류를 위조했다. 요즘의 가족관계부에 자기 이름을 ‘김서희’, 남편은 ‘최길상’으로 바꿔 기재했다. ‘최 참판댁 무남독녀’로서 어떻게든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민법은 제정 당시 자녀는 무조건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했다. 어떤 예외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는 ‘딸은 대를 이을 수 없다’는 가부장주의와 직결됐다. 자손 대대로 집안 성을 물려주며 대가 끊기지 않게 하려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남아선호’가 확산되게 됐다.
‘부성(父姓)주의’는 헌법이 규정한 양성평등 원칙에 어긋나 위헌이란 의견이 2000년대 중반 이후 꾸준히 제기돼왔다. 노무현 정부가 2005년 호주제를 폐지하면서 부성주의도 손을 봐야 한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당시 이 문제가 헌법재판소에 제기됐을 때 9명의 헌법재판관 중 유일한 여성인 전효숙 재판관이 “국가가 일방적으로 부성의 사용을 강제하는 건 혼인과 가족생활에 있어 양성평등을 명하고 있는 헌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냈다.
‘자는 부의 성과 본을 따른다. 다만 부모가 혼인 신고 시 모의 성과 본을 따르기로 협의한 경우에는 모의 성과 본을 따른다’(민법 781조 1항). 2005년 개정된 현행법은 부성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되 부부가 합의하면 모성주의를 적용할 길을 살짝 열어놨다. 이후 부모의 두 성을 함께 쓰는 이들이 생겼다.
법무부 산하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가 어버이날인 8일 여성·아동 권익 향상과 평등한 가족문화 조성을 위해 민법상 ‘부성 우선주의’ 원칙 폐기를 정부에 권고하기로 의결했다. 앞서 2018년 문재인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로드맵’에도 부성 우선주의 폐지 원칙이 담겼다. 저출산을 부추기는 불합리한 법제 개선의 일환으로 아버지 성을 우선하는 부성주의 원칙에서 부모 간 협의 원칙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7명은 자녀가 아버지 성을 따르도록 한 ‘부성주의’ 원칙을 없애는 제도 개선에 찬성했다. 남성도 63.4%가 부모가 협의해 자녀 성을 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등 국제사회도 한국정부에 불평등한 자녀 성 결정제도를 개선하라고 권고해왔다.
한국사회의 가부장제 뿌리가 깊다. 법제개선위원회의 부성 우선주의 폐기 권고를 법무부가 받아들일 지 주목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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