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수능 대리시험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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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사립대에 재학 중인 현역 병사가 선임병의 부탁을 받고 2020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대리로 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공군 모 부대에 근무하는 A 병사는 작년 11월 14일 휴가를 내고 서울의 한 수능 고사장에서 선임병(현재 전역) B씨를 대신해 수능을 치렀다. B씨는 정시전형을 통해 대학 3곳에 지원했고, 일부 학교의 합격권에 들었다고 한다. 교육당국은 지난 2월 국민신문고 공익제보로 접수되기 전까지 이런 내용을 까맣게 몰랐다.

수능 수험생은 응시원서를 낼 때 여권용 규격 사진 2매를 제출한다. 1매는 응시원서에 부착되고, 1매는 수험표에 부착된다. 수험표는 예비소집 때 받아서 수능 당일에 들고 간다. 수능 날 수험생들은 책상 위에 주민등록증 등 신분증을 올려놓는다. 감독관은 수험생들의 응시원서 서류철을 들고 다니면서 책상 위에 올려진 수험표, 신분증과 비교한다. 응시원서, 수험표, 신분증 3가지를 일일이 확인해 수험생 본인이 맞는지 점검하는 것이다.

이번 대리시험의 수험표에는 A 병사가 아닌 B씨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시험 감독관의 신분 확인 절차에서 적발되지 않았다. 수능 시험실당 감독관은 2명(탐구영역은 3명)이고, 교시별로 교체하게 돼있다. 이날 감독관이 10여명이나 됐음에도 적발하지 못해, 수능 부정행위 감독 체계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A 병사가 B씨와 닮아 보이도록 변장을 해 감독관 눈을 속였는지, 감독관이 본인 확인을 부실하게 했는지 등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수능 대리시험이 적발된 것은 2004년 11월 치러진 2005학년도 수능 이후로 15년 만이다. 당시 범인들은 특정 과목을 잘하는 ‘선수’가 휴대전화를 숨기고 들어가 정답 번호만큼 휴대전화 숫자를 두드려 바깥의 ‘도우미’ 후배들에게 답을 보내면, 이들이 다른 부정 응시자들에게 답안을 전송하는 방식으로 범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금의 부정행위 방지 체계를 만들었다. 모든 전자기기를 반입 금지하는 한편 본인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필기도구도 고사장에서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대리시험 사건은 정부가 대입 공정성 강화를 위해 수능 위주인 정시 비율을 현재 29%에서 40%로 늘리는 방안을 추진 중인 가운데 터져 교육당국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수능 신뢰도를 뒤흔드는 심각한 사안이다. 교사들의 주관적 평가와 ‘부모 찬스’ 논란이 있는 수시 대신 정시를 공정하다고 보는 시각이 학생과 학부모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데 뒤통수를 친 격이다. 교육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중대 사안인 만큼 부정행위 방지 장치를 다시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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