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2대 임금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면서 동서남북에 4개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화성 축성에 담아낸 꿈, 백성이 두루 잘 사는 신도시라는 원대한 기획을 위해 농업용 관개저수지까지 조성한 것이다. 당시 농사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물(비)을 가둬두는 저수지는 가뭄으로 인한 흉작을 막아 안정된 농업을 할 수 있었다.
화성의 북쪽에는 만석거(萬石渠ㆍ수원시향토유적 제14호)가 1795년에 축조됐다. 장안구 송죽동에 위치한 만석거는 ‘만석의 쌀을 생산하라’는 의미가 담겼다. 교구정(영화정)이 있는 방죽이라는 뜻에서 ‘교구정 방죽’으로 부르다가 ‘조기정 방죽’으로 불렸다. 1936년 수원군 일형면과 의왕면이 합쳐져 일왕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일제시대부터는 ‘일왕저수지’로 불렸다.
화성 남쪽에는 화성시 안녕동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1797년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했다. 원형은 없어졌지만 흔적이 발견돼 표석을 세웠다. 동쪽의 지동(池洞)에도 저수지가 있었다는데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조는 1799년(정조 23년) 서쪽에 축만제(祝萬堤ㆍ경기도기념물 제200호)를 축조했다. 팔달구 화서동의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이 담겼다. 축만제둔(祝萬堤屯ㆍ서둔)을 위한 관개시설로 조성된 것으로 내탕금 3만냥을 들여 만들었다. 문헌에 보면 제방 길이가 1천246척(尺), 높이 8척, 두께 7.5척, 수심 7척, 수문 2개로 돼있다.
축만제는 ‘서호(西湖)’로 많이 불린다. 화성 서쪽에 있기도 하지만, 중국 항저우의 ‘서호’만큼 아름답고 넓은 호수라는 의미도 있다. 서호에 비치는 낙조(西湖落潮)는 수원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호수 남쪽에는 1831년 건립된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이 있다.
축만제는 2016년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로부터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인정받았다. ICID가 축만제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가뭄에 대비한 구휼 대책과 화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식량과 재원을 제공하는 등 백성의 식량 생산과 생계에 기여했고, 화성이라는 신도시 건설의 하나로 조성한다는 아이디어가 혁신적이었고, 항미정 건립으로 관개용수 공급의 단일 목적을 넘어 조선후기 선비들의 풍류와 전통을 즐기는 장소가 됐다’는 역사문화적 의미가 컸다. 만석거도 다음해 같은 유산으로 등재됐다.
시민들이 즐겨찾는 공원인 축만제와 만석거가 60여년만에 공식적으로 옛 이름을 되찾았다. 수원시가 최근 국토지리정보원 고시(제2020-1130호)에 따라 서호와 일왕저수지 명칭이 원래 이름인 축만제와 만석거로 공식 변경됐다고 밝혔다. 수원시의 제 이름 찾기, 소중하고 의미있는 일이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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