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6월17일 새벽 2시30분께 워싱턴 D.C의 한 빌딩 경비원으로부터 불법 침입 신고 전화가 접수된다. 긴급 출동한 경찰은 현장에서 5명의 불법 침입자와 카메라, 도청 장비를 압수한다. 이들 중 한 명은 공화당의 닉슨 재선위원회 소속이고 또 다른 이는 백악관 직원이었다. 미-베트남 종전 6개월 전이자 대통령 선거로 주 전역이 후끈 달아오를 때다. 대부분 언론이 단순 절도로 보도했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민주당사 도청을 시도한 5명 체포’라는 제목으로 1면에 게재했다. 일명 ‘워터게이트 사건’이 수면으로 떠오르는 순간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이슈화하지 않았고 선거양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이후 연이어 터지는 언론 보도로 백악관 도청 공작이 드러나고 닉슨 책임론이 제기됐다. 재선에 압승하고 여론의 지적에도 버틴 닉슨은 결국, 국민에 잘못을 시인하고 대통령직을 사임한다. 결정적 증거인 백악관 녹음 시스템이 상원 청문회에서 폭로되지 않았더라면 사건은 그대로 묻혔다.
그의 불명예는 거짓과 수사방해 등 민주주의, 법치의 근간을 흔들고 국민을 속인 결과다. 일련의 과정에서 닉슨은 사건 은폐를 위해 법무장관이 아닌 차관보를 통해 특별검사까지 해임했다. 그가 임명한 법무장관과 차관 모두 명령을 거부, 사임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토요일 밤의 대학살’의 실체다.
청와대의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 관련, 법무부가 국회의 ‘13인 공소장’ 전문 제출 요청을 거부해 야당과 참여연대까지 나서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법조계는 사회적으로 파문이 일었던 사건의 공소장은 모두 국회에 제출해 놓고 청와대 관련 사건부터 새로운 기준을 적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부당성을 지적한다.
물론, 법무부 말대로 진행 중인 재판에 관련된 정보로 전문을 제출할 경우 형사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와 사건관계인의 사생활·명예 등 인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조국 사태부터 공소장 파문까지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해 법을 무시하고 국민 알권리까지 외면하고 있지 않나 되짚어야 한다. 국민 위에 선 정권의 밀어붙이기식 행태는 위태롭다. 김창학 정치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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