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벌 줄 때만 사용하는 재난매뉴얼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조선사연구>는 문헌 자료를 통해 일제강점기 관변 사학자들의 식민사관을 반박하고 우리의 역사와 얼을 지킨 위대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고대 역사서의 원문 인용이 많고 너무 어려워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은 두 명 - 저자 본인과 편집자(교정본 사람) - 밖에 없다.’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비슷한 얘기로 요즘 재난관리 분야에서는 ‘재난대응 매뉴얼을 읽는 사람은 처음 만든 사람과 나중에 벌주는 사람 두 명뿐’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각종 재난 유형별로 작성한 대응매뉴얼은 종류도 많고 내용도 방대하여 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양한 재난에 대응해야 하는 소방 입장에서 보면 그 많은 매뉴얼에서 정하고 있는 세부절차를 숙지하고 지켜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이다.

그런데 현장활동의 적절성을 사후에 따지기 위해서만 매뉴얼이 사용된다는 오해 때문에 오히려 매뉴얼을 멀리하는 현상이 생겼다. 현장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진 각종 계획서가 현장활동을 위축시키는 측면이 있다.

재난관리 담당자들은 매뉴얼과 같은 계획서를 만들기만 하면 재난관리가 되고 체계적으로 활동이 이뤄질 것이라 믿는 경향(Paper Plan Syndrome)이 있다고 한다.

그동안 상황별ㆍ유형별 다양한 매뉴얼을 만들었지만,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그래서 ‘매뉴얼은 현장과 맞지 않는다.’라는 인식이 퍼져있다.

경기도북부소방재난본부에서는 현장에서 느끼는 이런 거리감이나 부담감을 줄이기 위해 매뉴얼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 법령과 규정의 범위내에서 매뉴얼을 알기 쉽게 정리하고, 중복 또는 상충되는 내용을 찾아내어 일관성있게 정비할 계획이다.

그 성과를 검토하여 소방청에 법령과 규정의 개정을 요청하고, 다른 기관이 만든 매뉴얼에서 소방관련 조치사항도 정비할 예정이다. 현장에 녹아드는 매뉴얼을 위해 지속적으로 개선작업을 추진해 나갈 것이다.

매뉴얼이 현장성을 갖기 위한 원칙은 분명하다. 현장차원에서 쉽게 접근해서 편하게 읽고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 책상 위에 묵혀둔 ‘벌 줄 때만 사용하는 매뉴얼’을 이제 현장으로 보내자.

박춘길 경기도북부소방재난본부 예방대응과 구조훈련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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