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어느 총리부인의 이야기

북해를 거슬러 발틱해 입구로 가면 북유럽의 도시들이 여행자들을 반긴다. 독일 북단의 항구도시 함부르크가 제일 먼저 초겨울 바람을 뒤로하고 차분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유서깊은 천년 도시에 들어서면 ‘로키 식물원’이 있다. 함부르크 식물원의 이름이 이렇게 바뀐 것이다.

로키 슈미트. 그녀는 2차 대전이 시작되던 시기에 함부르크에서 10대의 학창시절을 보냈다. 혼돈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가 지나고 나치 독일이 제3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독일의 기갑부대가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곧이어 파리까지 입성했다. 머지않아 독ㆍ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공격할 채비까지 하고 있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궁핍해진 도시 함부르크에서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로키는 용모가 준수한 청년을 만났다.

조용한 성격의 두 청춘은 차분한 사랑을 키웠다. 애정이 깊어지던 시기에 헬무트는 한마디를 던지고 전장 깊숙이 나갔다. 살아 돌아오면 결혼하겠다고 로키에게 다짐했다. 행운이 외면하지 않았던 두 남녀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결혼했고, 불행도 비켜가지 않아 갓 출산한 영아가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다.

전후 독일은 패전의 상처와 굴욕 속에 상상 이상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도시들은 모조리 폐허였고, 빈곤은 끝을 몰랐으며, 수도 베를린은 갈갈이 나뉘어 점령군들이 활보했다. 로키는 초등학교 교사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남편이 정치 무대에 발을 들여 분투할 때 그녀는 학생들에게 독일정신을 가르쳤다. 근면과 단합 속에 독일은 다시 일어서고, 헬무트와 로키는 각자의 영역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30년 초등교사직을 마친 로키는 자신을 찾았다. 배우자 헬무트 슈미트가 연방총리로 재직할 때도 자신의 영역이 있었다. 총리공관을 떠난 이후에는 온전히 자신의 일에 전념했다. 멸종 식물에 대한 연구가 그녀의 새로운 본업이 되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남편이 강연과 대담, 집필 활동에 전념할 때 로키는 세계 도처를 다니며 위기에 처한 식물 보호와 연구를 위해 정열을 소진했다.

91세에 세상과 작별한 로키 슈미트는 생전에 <붉은 카펫 위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란 저서를 통해 북유럽 여인답게 자신의 인생을 진솔하게 기술하고 있다. 총리부인의 시간은 그녀의 인생 여정에서 극히 일부분이었다. 소시민적 스타일과 시대의 상처 속에서도 자기 인생을 찾기 위해 분투한 여성이었다. 함부르크 시민들은 아직도 바라볼 여성이 있다. 독일 국민은 오늘도 기억하고 싶은 총리부인이 있다.

30년 전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듬해 독일이 다시 하나가 되는 통일의 전야제 같은 날이었다. 독일통일의 진짜 장벽은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이 아니라 파리의 엘리제궁과 런던의 다우닝 10번가였다. 놀라운 일도 아니듯이, 독일 분단을 끝까지 고집한 국가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 부처 그리고 영국의 마거릿 대처 내외와의 특별한 친교를 통해 통일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헬무트 슈미트 부부였다.

통일의 위업은 그저 다가올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독일인의 성취였다. 그들 민족을 강제 격리시켜 놓은 주변 강국들의 오만과 견제를 유럽의 정신 ‘관용’으로 바꾸어 놓게 했다. ‘헬무트 콜’과 ‘한스 디트리히 겐셔’로 이어지는 독일인들의 견고한 대오에 강인한 함부르크 여인이 기나긴 세월동안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굳건히 서 있었던 것이다. 로키 슈미트(Loki Schmidt), 그녀는 독일인의 전형이었다.

최승현 경기도 국제관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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