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건물의 소유자인 갑은 상인 을에게 보증금 5억 원, 월세 700만 원에 건물을 임대하면서 세금을 아끼기 위해 관할 세무서에 보증금만 신고하고 월세는 신고하지 않기로 을과 합의했다. 이와 관련해 갑은 을로부터 ‘을이 보증금과 월세를 신고하면 월세 700만 원에 대한 소득세, 부가세 등 제세금은 을이 부담한다’라는 내용의 각서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을은 세무서에 보증금과 월세를 모두 신고했다. 임대차 기간이 만료해 을이 갑에게 보증금 5억 원을 돌려 달라고 하자, 갑은 ‘을이 월세를 신고해 소득세와 부가가치세를 추가로 납부하게 됐다. 각서에 따라 위 세금은 을이 부담해야 하므로, 갑이 반환할 보증금에서 위 세금 상당의 돈을 공제해야 한다’라고 항변했다.
이처럼 거래 당사자들이 세금을 절약하기 위해 세무서 등에 허위의 거래 내용을 신고하고 만일 일방이 이를 위반해 증가한 세금은 그 위반자가 납부하기로 하는 합의가 이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위에서 제시한 사례도 실제 재판에서 다뤄진 사건(대법원 2010다95062호 판결과 그 원심인 부산고등법원 2009나6318호 판결)의 사실 관계를 일부 변형해 구성한 것이다. 위 사안에서 약속을 지킬 것을 을에게 요구하는 갑의 주장은 타당한가?
‘계약을 맺었으면 지켜야 한다’라는 것은 우리 법의 대원칙이다. 위 사안에서 갑과 을은 자유로운 의사로 합의(계약)를 하고 그 증거로 각서를 작성했다. 따라서 을은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위 원칙에 대한 중대한 예외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민법 제103조이다. 이에 따르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는 무효이다. 예컨대 청부 살해의 대가로 돈을 지급하기로 한 ‘약속’, 공무원에게 뇌물을 주기로 한 ‘약속’ 등은 그 내용의 불법성으로 인해 무효이므로, 이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위 사안에서 갑과 을이 체결한 계약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세금 탈루를 목적으로 한 합의라는 점이다. 따라서 을에게 위 합의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을에게 세금탈루, 즉 불법을 감행할 것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이유로 법원은 갑과 을이 체결한 위 약정 중 ‘소득세’ 부분은 민법 제103조를 위반하여 무효라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을은 갑이 추가로 납부한 소득세를 부담할 의무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만, 법원은 ‘부가가치세’ 부분에 관한 합의는 유효하다고 판단했는데, 이는 부가가치세 자체가 본래 최종 소비자에게 이를 전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설계된 제도임을 감안한 것이다.
김종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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