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나혜석미술상’ 제정을 지지하며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그가 살아온 삶만큼이나 2019년 현재에도 수원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에서 ‘나혜석미술상(가칭)’제정의 필요성을 들어 3번의 공청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혹자들은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이들의 시각은 다음의 논리를 들어 부정과 긍정을 오가며 나혜석을 평가한다. 개화기의 여성인권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사실과,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유교사상을 흔들며 봉건적 가치관에 대해 논리적 변별로 당당히 대항했다는 것에 대한 부정론이 그것이다. 나혜석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임신 중 체험과 이야기를 담은 ‘모(母)된 감상기’와 자신의 이혼이야기를 담은 ‘이혼고백서’를 통해 사회통념을 격렬히 공론화시킴으로써 당시 정서를 대담하게 대척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한 사회적 편견과 비방은 1990년대 들어서 나혜석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재평가에서도 부정론과 긍정론을 오가며 양분되어 오늘에 이른다.

또 하나는 1910~20년대까지의 적극적인 항일 독립운동기와 1930~40년대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그녀의 미온적 행보와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기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작품 활동내용을 들어서 친일 행적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 시대를 살아온 모든 지식인들과 일반 국민들이 견뎌야 했던 핍박과 치욕의 세월이었음을 감안할 때 딱히 이분법적으로 재단할 수만은 없다.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 앞에 국어말살정책과 일본식 성명강요, 강제징병과 징용 등, 강요와 강제는 위로받고 치유해야할 국가적 아픔인 것이지 배척해야 할 논쟁의 중심은 아니라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분위기속에서 작가로서 자신의 예술혼을 실험하고 검증하기 위한 ‘조선미술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에서의 입상이 매국의 잣대이자 친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초기 ‘상해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전달했다는 기록과 김활란의 친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는 점은 뒤로하고 이후 1930~40년대의 나혜석의 미온적인 항일태도를 들어서 이를 매국으로 간주한다면 일제의 강제 앞에 고개 숙이고 숨죽이며 살아온 우리민족 대다수는 어떠한가? 적어도 문화예술에 대한 그녀의 예술적 가치만큼은 산문 70여 편과 시 4편, 희곡 1편, 소설 5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대한민국 근대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고 최초로 서양화를 우리나라에 도입한 여성 화가로서 2000년 대한민국 문화관광부에 의해 ‘2월의 문화인물’로 지정된다. 그녀가 던져준 여성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권익과 욕망, 아름다운 예술적 투쟁의 역사를 현재를 사는 모든 예술인들의 시각으로 계승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또 하나의 과제일지 모른다.

따라서 미술동네에서 바라보는 그녀의 이야기는 적극적인 재 조망과 발굴을 통하여 미래적 가치로 비중 있게 발전시켜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나혜석 미술상’ 제정은 긍정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나혜석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와 기쁜 소식은 정체된 지역미술계에 청량한 기쁨을 주는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나혜석에 대한 의미 있는 움직임에 대해 기대와 격려, 박수, 그리고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이영길 ㈔ 수원예총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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