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종전선언·평화협정 병행… 상호신뢰 증진 방안 실천되길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간 치열하게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6ㆍ25 전쟁은 정전상태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늘까지 66년이 되도록 남북간의 정전상태는 여전히 그대로다. 3년간 동족상잔의 6ㆍ25 전쟁은 김일성의 지시와 명령으로 시작됐다.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 군인 14만여 명과 외국군 4만여 명이 전사했다. 남한 주민 중에 전재민과 사망자는 약 15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남한의 인구가 약 2천만 명이었다고 보면 민간인의 피해가 얼마나 컸나를 짐작할 수 있다.

정전협정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 Clark) 미국 육군 대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원수 김일성,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팽덕회(彭德懷)가 했다. 그 외 참석자 신분으로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단 수석 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남일과 국제연합군 대표단 수석대표로 해리슨 미국 육군 중장(William K. Harrison) 등 5명이 서명했다. 전쟁 당사자인 우리나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남북의 분단을 의미하는 정전협정에 반대하여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한 정전협정의 당사자는 전쟁 쌍방의 군 사령관 간의 서명이기에 우리측은 유엔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클라크 대장이 서명하게 됐다. 정전협정을 반대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 조약과 한국군의 증편과 원조를 약속 받았다.

정전협정을 실제로 서명한 장소는 지금의 공동경비구역이 아니고 이곳으로부터 약 1.2㎞ 북서쪽에 위치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북한이 ‘평화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하고 있다. 이 ‘평화박물관’에는 1976년 미군 대위 아더 보니파스(Arthur Bonifas)와 미군 중위 마크 바렛(Mark Barrett)을 살해한 도끼도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북한은 평화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들의 평화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냉전시대의 사고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의 한일관계에서 보듯이 가해자에 대한 책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역지사지의 자세로 접근해보면 일본이 좀 더 진지하게 전향적인 자세로 임해야 하는데 이 부분이 한일관계에서 늘 아쉽다. 6ㆍ25 전쟁은 북한이 가해자이며 우리가 피해자이다.

2019년 6월30일, 판문점에서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장소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미북 정상 간의 만남에 응하는 유연함을 보여줬다. 북한으로서는 체제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북한 정권의 입장이나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란 것도 이해한다. 핵 무력을 완성한 북한이 그것을 아무리 방어용이라 내세우지만 남한이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대처하고자 하는 것을 북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남한 국민들이 이런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북한 지도부에 달려있다. 즉 남한을 겨냥한 수많은 장사정포의 철수, 땅굴의 공개와 폐쇄, 상호 군사연습 참관 등 군사적 신뢰 증진 방안을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면 된다. 앞으로 그렇게 추진해줄 것을 기대해 본다.

지난해 합의한 9ㆍ19 남북한 군사합의를 통해서 남북 상호간의 우발적 군사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 그에 대한 기대와 성과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앞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가는 과정에 병행하여 상호간의 신뢰 증진 방안이 실천되기를 바란다. 정전협정 66주년을 되새기면서 지난날 6ㆍ25 전쟁을 통해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의 희생과 비극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앞으로 한반도 평화와 미래를 향한 실제적인 조치가 구체화된다면 조금이나마 과거의 희생과 비극을 치유하는 단초가 되고, 또한 우리 국민도 그들의 잘못에 대해 어느 정도 관대해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본다.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