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햇볕이 따가워지고 장마철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린 지도 여러 날이 지났지만 열기를 식혀주는 장맛비의 시원한 추억은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다. 지구촌의 여러 지역에서 폭염에 시달리고 있어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기상이변은 아닐지라도 백 년 전의 우리 조상이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현대와 같이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을 현실에서는 이성적인 사유보다는 감정적인 사고가 앞선 영향으로 하늘에 대한 원망과 인간 세상에 대한 자책이 공존하였을 것이다. 지구라는 행성도 하나의 유기체의 범주를 벗어나서 생명체의 기능을 갖추고 스스로 변화를 모색한다는 존재임을 인간은 오만하게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면서 큰 지혜를 가질 수 있는 존재로서 석가모니불의 관점에서 관찰하였을 때 유일하게 부처를 이룰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육도의 수직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인간세상 위에 천상이라는 세계가 펼쳐져 있으나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성불을 향해 있지 않은 사상적 특성으로 부처가 출현하기 어려운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중생들이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서 존재하는 환경을 기세 간으로 구분하고, 중생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환경을 중생 세간으로 구분하며, 중생이 살아가는 몸을 오음세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중생들은 ‘나’라는 존재와 ‘우리’라는 공동체와 환경이라는 세간(世間)에서 삶을 수놓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물의 연결점과 같은 구조로 연결된 관계가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것이다. 항상 인식되는 관념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아도 모든 생명체는 대중을 벗어나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대중에 대한 배려보다는 개인의 이익에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금강경에서 첫째로 경계하는 ‘아상(我相)’이다. 이러한 아상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아만(我慢)’이 아닌 스스로 품격을 높이는 ‘자존(自尊)’으로 작용한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인다. 자신의 품격을 지키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의 품격을 존중하겠는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자리이타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남을 자비롭게 사랑하는 존경심이 있음을 폭넓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기세 간에서 펼쳐지는 현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언론에서 지구촌이라는 단어는 낯선 표현은 아닌데 이해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한국은 일본과의 과거부터 이웃이라는 관계가 무색하게 좋지 못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고 현재까지도 청산되지 못한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에는 위정자들의 잘못이 우선적으로 부상하겠으나, 이와 같은 문제를 역사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국민의 몫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일본과의 통상마찰이 심각하게 대립하게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된 이면에는 기초적인 기술적인 투자에 소홀했던 우리의 과거도 되돌아 보아야 한다. 한국의 현재의 현실은 중생 세간에서 벌어지는 사유의 법칙, 즉 이 시대의 사상적인 조류가 세계의 흐름과는 대치되는 현상으로 진행됐던 것이다.
중생 세간은 한국에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고 대륙과 해양을 넘어서 인류가 존재하는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까닭이다. 중생들은 이기적인 심성과 부처의 심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심성의 변화는 시대의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자신의 과오를 되돌아보지 않고,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며, 역사를 분석하지 않는다면 과거의 공업(共業)을 다시 되풀이할 뿐이다. 중생이 부처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현실의 세간을 냉철하게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첫걸음인 것이다.
세영스님 수원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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