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내내 김 부장의 속이 타 들어간다. 팀원들과 며칠 밤을 새워 만든 사업계획서를 들고 상사인 최 전무가 회장에게 보고하러 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 번씩이나 퇴짜를 맞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계획서를 작성한 팀원들에게 면목이 없어서다. 이번에는 최 전무의 의견이 대폭 반영되었으니 무리 없이 승인되리라 믿고 싶다. 사실 최 전무가 회장의 의중이라며 강력히 내세운 이번 사업계획은 미심쩍고 불합리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워낙 확고한 주장을 펼친 데다 직급이라는 권위에 눌려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과 독대를 마치고 싱거운 표정으로 최 전무가 나오고 있다. 김 부장과 팀원들을 소집하더니 처음 내뱉는 말이, “도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업계획을 짠 거야!”
직장 내 뒷담화를 듣자면, 의외로 최 전무 같은 관리자가 허다하다. 그들은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데 망설임이 없다. 조변석개(朝變夕改)는 임원의 필수역량으로 통한다. 여러 사람 앞에서 명백히 밝힌 말을 번복하는 데 스트레스를 받는 보통사람은 임원이 되기 어렵다고들 한다. 일관성 없는 자신의 언행에 고뇌하며 주춤거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직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회사가 어떻게 안 망하고 있는지 신기하다’는 직장인을 주변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한국은 기업하기 참 좋은 국가인 셈이다.
최근 진정성(authenticity)이란 용어가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고 학계에서도 연구가 활발하다. 최 전무의 경우도 진정성의 결여로 조직구성원의 신뢰를 잃어 버린 예이다. 진정성은 원래 복제, 모조에 대응하는 ‘진짜’를 뜻한다. 그렇다고 진정성이 단순히 거짓, 가짜의 상대적인 개념은 아니다. 타인으로부터 진정성을 인정받고 신망을 얻으려면 몇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우선 진정성은 심층적 성찰을 통한 자기이해에 기초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로 유명한 소크라테스도 관습,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내면의 본성을 따르라고 설파했다. 자기를 바르게 인식해야 자신에게 먼저 진실할 수 있다.
진정한 자기이해는, 나를 남처럼 돌아보는 데 거치지 않고 남을 나처럼 배려하는 경지로 귀착된다. 자기중심적인 야망, 권력성취, 쾌락이 진정성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정의, 자유, 박애와 같은 자기초월적 대의가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와 신념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확립된 가치와 신념은 언행일치의 원동력이 된다.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소신껏 행동하므로 주위의 기대, 이해득실에 흔들림이 없기 때문이다. 언행일치가 한결같아야 주변의 신뢰,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서양의 진정성 개념을 중용의 성론(誠論)에서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誠은 말(言)과 이루다(成)가 결합해 ‘말한 것을 성취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를 오롯이 달성하려면 거짓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하므로 진정성과 맥이 닿아 있다. 인간에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 중용에서는 ‘성(誠) 그 자체는 하늘의 순리고, 성(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라고 분별한 모양이다. 인간이 진정성을 단방에 이룰 수 없으나, 진정 어린 삶을 면면히 추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인구 5천만 명 이상인 선진국들을 ‘3050클럽’이라고 부른다. 최근에 우리가 7번째 국가로 합류했다. 이에 비해 사회지도층의 음험한 부정비리, 기업인의 표리부동은 우리를 암울하게 만든다. 천성에 부합하는 진정한 삶의 방법론으로 제시된 중용의 다음 경구가 예사롭지 않다.
‘옳은 일을 택해 굳게 지켜라(擇善固執)’
우형록 경기대 융합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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