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 학기를 시작하며 작정하고 윤치호의 일기와 그에 관한 연구 논문들을 읽었었다. 유교 조선의 암흑기에 태어나 열강의 탐욕에 노출되어 있던 개화기를 거쳐 일제 식민지와 우울한 해방 초기에 살았던 그의 일생은 한마디로 파란만장한 풍운아의 삶이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사회진화론에 동의하여 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동화되어 간 듯한 그의 일생을 두고 연구자마다 시각의 차이가 있어서 논란과 비판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그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던 한 인간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주변을 관찰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끝없이 고민하던 사람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고민하는 존재이다. 그 대상의 여부에 따라 성찰의 범위와 고민의 한계가 결정될 수는 있겠지만, 매사에 자신의 삶에 대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깊이 고민하는 것은 인간만의 특성이라 하겠다. 특히 한해의 마지막을 보내고 시작할 때는 마치 철학자의 심정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통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대표적 작품인 <지옥의 문>에는 절규하는 온갖 영혼과 군상들의 고통스러운 형상이 부조되어 있다. 로댕은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만의 ‘방주’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할 때 그의 이 작품은 어떻게 살아야 지옥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그의 몸부림의 표현이라고도 하겠다. 그것을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이 그 문 상단 아래 고통스러운 태도로 고뇌하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멀쩡한 사람도 취하기 어려운 불편한 자세로 구부린 채 고민하며 생각하는 그 사람은 어쩌면 로댕 자신이었을 것이고 시대의 풍운아 윤치호였을 것이며 화살같이 빠른 일생을 수고하다가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는 평범한 우리 자신을 형상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난해는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올해만큼은 더 잘 살고 싶은 것이 보편적 인간의 생각이라고 할 때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숙제이겠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의 고민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어떤 청년이 예수께 나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16)고 질문하였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수의 대답은 먼저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계명은 약속이다. 그것은 먼저 신과 인간의 약속이고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다. 또한 그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의무사항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질문하는 인간의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게 사회 관습적 의무 이행으로 끝나는 무감각적이고 무감동적인 계명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자기희생이고 헌신이다. 의무적인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헤아림이 절대 필요하겠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가진 재물이 많아 고민하며 쓸쓸히 돌아가 버렸던 청년처럼 애써 고민하고 계획한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살면 좋을까? 하나 더 가지려고 계획하기 전에 자신을 한 번 더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세계와 국가와 사회와 가까운 이웃을 돌아보면서 유익을 주는 빛이 되고 필요한 소금이 되었으면 더 좋겠다.

강종권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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