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교하노씨묘역 여말선초 묘역변천과정 보여줘…향토유적지정 시급

▲ 노한의 난간석무있는 묘역, 노사신묘 석물
▲ 노한의 난간석무있는 묘역, 노사신묘 석물

조선 초 법전인 ‘경국대전’ 편찬을 주도했던 노사신 등 여말선초에 왕실과 통혼한 파주 백석리 교하노씨(交河盧氏) 묘역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 강제 이장되는 역사적 과정이 기록된 것은 물론 묘제와 석물이 당시 묘 변천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는 등 문화재로써의 가치가 높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파주문화원 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차문성 소장은 25일 ‘일제 강점기 교하노씨 묘역의 이장 과정과 제(諸)석물의 문화적 가치에 관한 고찰’이란 논문을 통해 이 같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본보에 최초 공개했다. 차 소장의 논문은 지난 10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원연합회가 공동주최한 제33회 전국향토문화공모전에서 대상(국무총리상)을 받았다.

논문에 따르면 한양(서울 대방동)에서 500년 동안 머물렀던 교하노씨 창성군파 묘역(조선 초 좌의정을 지낸 노한과 그의 어머니 개성왕씨부인 그리고 손자인 노사신 등 5기)이 본관이 있는 파주 백석리로 선영을 이장한 것은 일제 강점기 때인 1940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해서다. 종중은 당시의 험난했던 천장 과정(1940~1942)을 임오년(1942) 9월 묘역 입구에 ‘천봉사적비’라는 비문석으로 새겨 놓았다. 차 소장은 “천봉사적비에는 사패지인 선영을 국영(國營ㆍ조선시가지계획령)이라는 미명 아래 파주로 천장한 과정을 기록했다”며 “이는 당시 시가지계획령이 사대부선영과 왕실묘소를 국영에 강제 편입, 이장됐던 사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라고 설명했다.

▲ 노한 묘 뒤 바닥 난간석주, 노한묘에서 발견된 난간석주
▲ 노한 묘 뒤 바닥 난간석주, 노한묘에서 발견된 난간석주

또 고려 종실 한성부원군의 딸인 개성왕씨대부인(1353~1439, 남편 노균)과 조선 초 태종과 동서지간인 노한(1376~1443), 그의 손자인 동국여지승람과 경국대전 편찬을 주도한 노사신(1427~1498) 등의 무덤 석물은 14~15세기 초의 석물양식 변화를 잘 보여주는 묘역이다. 차 소장은 “사각형 2단 석축으로 조성된 봉분을 가진 왕씨부인과 노한 묘는 세종 때까지 금표의 기능을 했던 난간석이 있었는데 이는 왕릉외 사대부묘에서 발견된 희귀한 사례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사대부묘에 난간석문이 있는 곳은 전국에서 교하노씨 묘역과 연천 홍길민묘(1353~1407)에만 남아 있다.

차 소장은 특히 “노한과 노사신 신도비 2점의 시대양식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며 “노사신 신도비는 부마집안이었던 임사홍이 적었고, 그의 묘 무석인은 고개를 돌려 동적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어 그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덧붙였다.

차 소장은 “역사적 의미가 깊은 교하노씨 묘역은 무석인 한 쌍과 개성왕씨대부인 난간석문 등이 도난당하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면서 “유적으로서의 보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파주=김요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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