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강빈… 못다 이룬 ‘꿈’
소현세자가 17대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던, 그리하여 조선을 변화시킬 세자의 스러진 꿈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활약했던 세자빈 강빈의 존재를 알게 되면 이러한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한 영회원(永懷園)은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강감찬 장군의 19대손으로 본관은 금천이고 우의정이었던 강석기의 둘째딸로 1611년에 태어났다. 강석기는 서인 명문 집안으로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었다. 광명시 노온사동은 500여 년 간 이어져온 금천 강씨의 세거지로 강석기선생의 호인 월당(月塘)도 이 지역에 전해져오는 연못에서 유래한 것이다.
민회빈 강씨는 1627년 만16세의 나이로 세자빈이 되어 소현세자와 결혼하였다. 충실하게 궁중의 법도를 배우며 조선 왕위에 오를 남편 소현세자를 따르던 민회빈은 병자호란 이듬해인 1637년에 남편 소현세자와 시동생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 장씨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간다. 심양에 도착한 강빈과 소현세자를 포함한 조선인 192명은 심양관소, 즉 심관(瀋館)에 거처했다.
이곳에서 소현세자는 국왕 인조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고 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강빈은 청나라가 밀거래를 요청해오자 이를 활용하여 뛰어난 장사수완을 발휘하였고, 소현세자가 청 황제의 수행으로 심양관을 비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강빈은 세자의 역할을 대신해 조선에 보내는 장계까지 직접 챙기며 심양관의 실질적 경영자로 활약하였다.
청이 심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직접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라는 요구를 하자, 강빈은 조선 관리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강빈은 청과의 거래로 축적된 상당한 부를 이용해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속환해 농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고, 조선의 우수한 농사기술을 이용해 해가 거듭될수록 큰 수확을 이뤘다. 주목할 것은 심관의 재력을 바탕으로 청나라에 끌려온 수백 명의 조선인 포로들을 해방시켰던 일도 강빈이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1644년 청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자, 소현세자와 강빈도 북경에 들어가서 두어 달 동안 머물렀다. 이때 천주교 신부이자 천문학자인 ‘아담 샬’과 역사적인 교류를 맺게 된다. 조선 포교에 뜻을 둔 아담 샬은 세자와 강빈에게 천주교 교리와 천문학, 서양의 최신 과학기술을 전하고 천문, 산학, <성교정도> 등의 책과 여지구, 천주상 등을 선물로 주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부부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는 8년간의 억류생활을 끝마치고 볼모생활동안 얻은 서양 책과 물건, 중국인 천주교 신자들과 함께 조선으로 귀국한다.
한편, 고단한 이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세자 내외를 대하는 인조 임금의 태도는 의구심과 적대감으로 일관했다. 그것은 청나라에서 세자에게 전위하도록 압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와 함께 부왕의 기대와는 달리 세자의 친청적인 태도, 귀국할 때 비단 황금 등 많은 물화를 가져온 점, 특히 임금의 총애하는 비 조소용과 세자빈의 반목 등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이런 뜻밖의 상황 속에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뒤인 4월 26일 학질 진단 후 침을 맞고 34세의 나이로 급서를 하였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음에도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 후 강빈과 대립관계에 있던 인조의 후궁인 소의 조씨의 무고에 따라 민회빈 친가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켰다. 이후 강빈은 인조에게 조석 문안을 거부하는 등 갈등이 더욱 악화되었다.
경험하기 힘든 타국에서의 볼모생활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진취적인 자세로 삶을 개척해나갔던 여장부의 역경의 여정도 여기서 사그러지고 멈춘 것이다.
인조와 효종대의 <조선왕조실록>이 전하는 강빈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하였다.……세자가 강학을 폐지하다시피하고 무부와 노비들을 가까이하며 화리만을 추구하고 서양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범한 것은 대개 이 사람 탓이다. 세자가 병이 있는데도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음란하였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발악할 정도로 불손하고 거겠다. …” 그러나 집권세력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러한 평가를 관점을 바꾸어보면 강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재에 밝아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베풀어 사람을 주위로 모여들게 한 것은 오늘날 여성 CEO의 자질로, 중세적 부인의 도리를 과감히 벗어남은 현대적 여성 지도자의 면모로, 시대에 앞선 서양문물의 도입 의지가 소현세자의 잘못이라면 강빈은 남편의 꿈을 이해하고 함께 나눈 미더운 동반자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녀의 음란함은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며, 불순하고 거센 성격이란 정당한 분노의 솔직한 표출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민회빈의 억울한 죽음을 복권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이어져 1718년 숙종대에 이르러 그녀의 무혐의를 인정하고, 민회(愍懷)라는 시호를 내려 복권시켰다. 억울하게 죽은 지 80년 만이었다.
세자빈이 죽은 후 금천(衿川)에 있는 강씨 집안 선산에 예장하였다. 그 후 1718년(숙종 44)에 숙종이 오랜 숙원을 풀어주었다. 강빈의 시호를 회복하고 봉묘도감을 설치한 후 원묘(園墓)로 개수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때 묘를 추봉(追封)한 뜻을 돌에 새겨 혼유석(魂遊石) 아래 전석(?石) 왼편에다 묻었다. 숙종은 승지를 보내 임금이 친히 지은 제문을 가지고 민회빈(愍懷嬪)의 묘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한편 아쉬운 점은 현대에 이르러 영회원 주변의 토지가 민간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정자각, 홍전문, 재실 등이 훼손되어 능침 부분만 남아 있는 점이다. 또한 그 동안 비공개지역으로 폐쇄되어 시민들이 찾기에도 불편하였다.
그러나 최근 관리부처인 문화재청과 광명시에서는 보호구역을 정비하는데 나섰다. 사유지를 매입하고, 주변의 외래 수목을 제거하고, 무허가 건물을 철거를 하여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2018년에는 훼손된 곡장의 정확한 위치와 규모를 알기 위해 발굴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정자각, 홍전문, 재실터 등의 발굴이 완료되면 품격 있는 조선 왕실의 묘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더불어 못다 이룬 민회빈 강씨의 꿈도 오늘날의 우리도 같이 꿀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양철원(광명시청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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