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정명 1000년, 경기문화유산서 찾다] <14> 안양 만안교(萬安橋)

왕과 백성·과거와 현재 잇는 ‘소통의 다리’

“어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던져라/ 붉은 난간 아득하게 먼 들판 안았는데/ 돌아보니 만안교 밑으로 흐르는 시내가/ 도도하게 날마다 콸콸 흘러내리는구나./ 엎드려 바라니 상량한 뒤에/ 기둥들은 빛을 발하고/ 온 동네는 더욱 넓어져라./ 바람과 구름은 현륭원에 있는 나무들 길이 보호하여/ 그 복을 더욱 돈독히 하고/ 산과 물은 누각의 해자를 둘러 안아서/ 길이 이 땅을 편안하게 하소서.”

 

1796년 11월에 우의정 윤시동이 지은 신풍루 상량문의 끝부분이다. 이처럼 만안교와 화성 행궁은 동시대의 문화유산이다.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위치한 만안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8호)는 안양시민들에게 아주 친숙한 유적이다. 매년 정월이면 이곳에서 답교(다리 밟기)축제가 벌어지고, 10월초에는 안양시민의 날 행사인 ‘만안문화제’가 열린다. 안양시 도심을 가로지르는 만안로 역시 이 다리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처럼 안양시 역사문화의 뿌리와 줄기인 이 돌다리는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러 갈 때 사용되었다.

▲
▲ 안양 만안교 전경

■ 길이 31.2m 너비 8m ‘돌다리’

즉위한 지 13년이 되던 1789년, 정조는 오랜 숙원을 풀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자급자족의 신도시 화성을 건설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조는 매년 현륭원을 참배했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창덕궁을 떠나 용산에서 배다리로 동작나루를 건너 남태령을 넘고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지지대고개를 넘는 길이었다. 그러나 과천의 노정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참여한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노량진에서 시흥, 안양, 수원의 새로운 행로를 만들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는 과천길에 남태령이라는 가파른 고개가 있어 겨울철에 오가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새롭게 길을 개척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처음에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했으나 1795년(정조19)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돌다리를 완성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 31.2m에 너비 8m인데 실용성이 돋보인다. 가로로 열두 명의 병사가 지날 수 있고, 말을 탄 다섯 기병이 나란히 지나 갈 정도로 넓은 이 다리의 바닥은 대청마루를 엇물려 짠 것처럼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정교하게 깔았다. 7개의 홍예는 하단부터 곡선을 그어 전체의 모양은 반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홍수가 져도 바닥이 파이지 않도록 시내 바닥에 반반하게 다듬은 판석을 넓게 깔았다.

 

원래는 현재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던 것인데 1980년 8월 국도를 확장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아무튼 정조가 행차하던 이 원행길은 훗날 1번 국도가 되고, 수원을 거쳐 삼남으로 연결되는 철도도 이 길을 따라 났다.

 

■ 만안교 건설의 숨은 주역 ‘신형’

만안교는 임금의 행차가 편안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는 이 다리를 건설한 주역은 누구일까. 경기감사 서유방의 공로는 알려진 것이지만, 실제로 공사를 감독한 주역은 따로 있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 인물은 평안도 안주에서 차출되어 온 무관 신형(申泂)이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신형은 1794년 3월에 간역(看役)으로 임명되어 11월에 이르기까지 실사 266일, 1795년 8월에서 17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실사 246일

 

동안 장안문을 비롯해 동장대 등을 건설한 것으로 확인된다.

 

1797년 1월 말, 만안교에 도착한 정조가 다리를 건설할 때 감독한 신형을 어가 앞으로 불러 성명을 아뢰게 하고, 새롭게 건설한 다리가 잘 되었다며 칭찬했다. 정조와 신형의 일문일답이 이어진다. “지금 이후부터 아무 염려가 없겠느냐?” “이전에 비하면 완전하고 단단합니다” “그런데도 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냐?” “다리 아래 좌우의 석축 부분의 미진한 곳을 마무리한 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너는 화성성역에서는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떤 상을 받았느냐?” “장안문의 성벽 700보를 쌓았고, 동장대를 간역했으며 신은 이미 재작년에 오위장을, 작년에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정조가 다시 물었다. “변장을 지냈느냐?” “아닙니다” “네가 수고 많았다. 화성에서 명을 기다려라” 정조는 신형이 평안도 안주 병영의 장교라는 사실도 알고 있을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 화성 성역의 총재대신 채제공이 신형을 첨사로 제수할 것을 청하자 허락했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797년 2월 1일자로 신형을 청성 첨사로 삼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기억할 사람은 안양의 백성들이다. 관악산과 삼성산 자락에 화강암이 많고 석공도 많아 석수동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 석공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정조 편안한 원행길 ‘효행의 다리’

정조는 원행을 ‘행행(行幸)’이라 선언했다. 곧 행복한 나들이라는 뜻이다. 정조의 뜻대로 원행길에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어가를 호위하는 5군영 군사들의 진법훈련도 길 위에서 벌어졌다. 백성들은 장용영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병사들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한 훈련을 지켜보았다. 백성들에게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이지만, 군사들에게는 행군과 훈련이 동시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병사들에게도 원행이 끝나면 무예를 시험보아 부상을 넉넉하게 주어 격려했다.

 

원행을 시작하면서 ‘신작로’(新作路)를 건설한 것도 특별한 일이다. ‘신작로’라는 용어는 정조4년(1780년)에 처음 등장하는데, 수원으로 원행이 이루어지면서 신작로는 더욱 자주 나타난다. 그러나 국왕의 잦은 행차가 백성들에게 좋을 수만 없는 일이다. 왕의 행차를 위해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수고를 덜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 했다. 정조는 지역 수령들에게 무보수의 부역을 시키지 말고 일당을 지급하여 백성들의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지시했다. 아울러 백성들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격쟁’을 허락했다. 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은 왕과 백성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꽹과리를 쳐 원통한 일을 고하면 왕이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재위 24년 동안 1천335건의 격쟁 처리했다. 백성들이 행복한 행차가 되어야 한다는 정조의 신념이 만들어낸 특별한 행사였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다가가려는 정조의 노력으로 13번의 원행길은 큰 원성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정조의 효심은 고을과 고을을 잇는 신작로로, 신도시 화성의 건설로 결실을 보았다.

 

원행은 농사철을 피해 농한기인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겨울철 눈 쌓인 험한 남태령 고개를 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길을 닦으려면 수고도 배로 들었다. 해당 고을의 수령들에게 대안을 마련하도록 어명이 하달되었다. 새로운 길을 어디로 내면 좋을 지 살펴본 수령들은 시흥로가 편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 시흥로는 화성 성역이 착공된 지 2개월 째 접어든 1794년 4월에 개설되었다. 거리는 과천로와 비슷했으나 시흥로의 지세가 평평하고 넓었다. 정조는 원행을 앞두고 금천현감을 한 등급 높여 현령으로 승격시키고, 금천이란 읍호를 옛 이름인 ‘시흥’으로 개칭했다. 더불어 그때까지 ‘금천로’로 불리던 노정 또한 ‘시흥로’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 시흥로는 조선시대 도로건설의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사업이다. 이때 새로 닦여진 노량진과 화성을 잇는 넓은 신작로는 한양과 화성의 거리를 좁혀줬다.

 

1795년 9월, 경기감사 서유방이 안양천에 석재로 만안교를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완공했다. 이 만안교는 현륭원 부근 황구지천에 놓았던 대황교와 함께 원행 과정에서 축조된 석교이다. 잘 닦여진 신작로 ‘시흥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과 수원을 잇는 육상 교통의 대동맥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만안교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서 있다. 만안교비는 높이 164cm, 너비 64cm, 두께 34cm이다. 1795년에 건립된 만안교비는 서유방(徐有防, 1741~1798)이 비문을 짓고, 명필 조윤형(曹允亨)이 본문 글씨를 썼다. 비석 전면의 ‘만안교’라는 큰 글씨는 예서의 대가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1834)의 작품이다. 공사를 지휘 감독하고 비문을 지은 서유방은 그 형인 서유린(1738~1802)과 함께 정조의 최측근이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