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창연한 석탑… 흥망성쇠 천년의 이야기를 들려주다
이곳에 보물 제13호 삼층석탑과 보물 제12호 오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탑은 천년 세월 동안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언제 누가 세웠는지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부근에서 발굴된 기와조각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이곳에 있었던 절의 이름이 동사(桐寺)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석탑과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화를 나누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이 석탑이 자리 잡은 지리적 환경을 꼼꼼히 살피는 일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석탑의 형식이 통일신라의 석탑을 계승했으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끝으로 이 석탑이 세워진 10세기가 격동의 시대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천년 석탑과의 대화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8세기에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웠다. 그러나 9세기부터 왕족의 분열과 귀족들의 정쟁과 사치로 신라는 빠르게 쇠락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견훤이 후백제를, 궁예가 고려를 세우면서 후삼국이라 불리는 격동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탑이 세워진 10세기 초는 그야말로 난세였다. 50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에 신라가 삼국으로 분열되고, 이 삼국을 고려가 재통일하는 극적인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렵에 세워진 춘궁리 석탑에서 고려인들의 꿈과 기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외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한민족의 대통합에도 성공했다. 신라와 비슷한 시기에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워 ‘해동성국’이라 불리던 발해도 신라처럼 운명을 다했다.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압제를 피해 동족의 나라 고려로 망명한 발해의 유민을 태조 왕건이 따뜻하게 받아들여 민족통일의 대업을 완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춘궁리 동사에는 정토세계를 꿈꾸는 수많은 고려인들이 모여 들었을 것이다. 초파일을 앞둔 요즘과 같은 봄날, 탑돌이를 하며 화합과 상생을 염원했을 고려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면 석탑과의 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 두 개의 산성과 마주한 석탑동사지의 건너편에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있다. 동쪽으로는 춘궁동 옛 마을과 남한산성, 서쪽으로는 몽촌토성과 백제고분군이 있다. 그리고 이 일대에 백제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널려 있어 백제의 첫도읍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남한산성과 이성산성, 그리고 한강이 동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은 이곳이 후삼국 시대에도 격전지일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사는 절터 규모로 볼 때 고려시대에 경기도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여기서 잠시 탑에 대해 알아보자. 석가모니 부처의 뼈와 사리를 사리함에 넣어 토석을 쌓아 올린 묘를 스투파라고 하는데, 범어 스투파(stupa)를 탑파(塔婆)라고 한자로 옮기면서 ‘탑’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탑의 구조는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로 이루어진다. 1층이나 2층으로 마련하는 기단부는 탑의 무게를 받치는 역할을 한다.
기단부 위의 탑신부는 탑의 핵심인 사리를 봉안하는 몸체이다. 지붕처럼 생긴 옥개석은 탑의 신앙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부분이다. 상륜부는 탑의 가장 높은 부분으로 노반과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찰주로 구성된다. 탑은 나라마다 특성을 드러내는데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 한국은 석탑이 발달했다.
7세기 초 백제에서 처음으로 목탑을 본뜬 석탑이 건조되었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 가장 건축이 발달한 나라였다. 신라가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백제의 아비지가 초빙되었던 것이나 일본의 초기 사찰을 만들 때 백제의 장인들이 공사를 담당했던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춘궁리 석탑 역시 백제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이어지는 한국 석탑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 천년의 세월을 견딘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1988년에 실시한 발굴조사 때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의 주변에서 주춧돌이 일부 드러나 있는 금당지를 포함한 네 구역의 건물터를 확인했다. 금당지 안에서 불상대좌의 기단부로 보이는 유구도 발견되었다. 석탑의 동북쪽 계곡 위에서 우물터가 발견되어 승방지 또는 식당지로 추정하는 곳이다.
1911년 동사지에서 고려시대의 철불이 출토되었다. 보물 제332호로 지정된 이 철불은 현존하는 철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국립 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 긴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가고, 얼굴에 비해 인중이 짧고 입이 작아 부처의 자비보다 고려인의 강인한 기상이 느껴지는 불상이다. 왕건의 얼굴로 알려진 철불도 있을 만큼 고려 초에 철불이 유행했던 사실도 주목된다. 철불이 발견된 동사는 태조 왕건의 정치세력 기반과 깊이 관련이 있다.
학계는 고려 초에 이 일대를 장악했던 호족 왕규(王規)를 지목하고 있다. 태조의 16번째 비가 낳은 왕자 광주원군의 외조부 왕규는 두 딸을 태조의 후비로 들일 정도로 광주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나갔으나, 945년 왕위계승을 두고 겨루다가 패하면서 몰락했다. 이에 따라 이 철불의 제작 시기를 왕규가 활동했던 10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높이 7.5m로 경기도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큰 탑이다. 이 탑의 기단은 여러 장의 사각형 석재로 조립했는데 각 면에는 모서리기둥과 버팀기둥이 새겨져 있다. 1층 탑신은 상하 2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다른 석탑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옥개석이라 불리는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면서 모퉁이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구성에서 규칙적이며 전체의 비례도 양호하다. 이 석탑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지만 신라 석탑의 양식인 정사각형의 탑으로 탑신부의 각층 비례도 조화를 이루는 등 양식에서 신라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일부 탑재와 상륜부가 사라졌지만 상태가 좋은 편이다. 하층 기단 각 면석에는 안상무늬가 3조씩 새겨져 있으며, 층급받침이 3단인 탑신부의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며 섬세하고 수려하다. 높직한 1층 탑신에 비해 2·3층의 높이가 크게 줄어든 것은 고려시대 석탑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보수할 때 하층기단 중심부에서 금동불을 비롯한 귀중한 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처럼 두 석탑은 신라 석탑을 계승하고 있으나 고려 석탑의 작풍도 엿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 석탑에 담긴 시대상
삼국통일 후 석탑의 조형미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다.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한국 석탑의 멋과 아름다움이 잘 구현되어 있다. 이후 신라의 석탑은 작은 변화가 생기다가 9세기 후반에는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이 무렵 신라 왕실의 골육상쟁과 지방 호족들의 각축이 격화되었다. 사회가 혼란해지자 탑에서도 섬세한 아름다움과 씩씩한 기상이 사라져갔다.
신라 중대에 성행한 불교는 <화엄경>을 기본 경전으로 한 화엄종이다. 화엄사상의 ‘일즉다, 다즉일’은 국왕과 다수의 민이 하나라는 통합의 이념을 제공하여 중앙집권적 통일제국의 성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크게 성행한 선종 불교는 경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안에 존재하는 불성을 깨치고자 했다.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지방에 웅거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 호족의 의식구조와 부합하는 측면이 많았던 선종은 지방 호족들에게 환영받아 널리 유행했다. 아울러 지방 호족들은 풍수지리설까지 받아들여 신라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 춘궁리 석탑서 화해·협력의 대동 세상을 상상하다
우리는 1천 년 전에 민족의 재통합에 성공한 고려의 문화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라 말의 대학자 최치원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을 유불선이 어우러진 풍류도라 하였다. 고려 역시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고 유교와 도교의 제천의식도 함께 시행하는 개방형 국가였다. 고려는 통일신라와 고구려, 백제는 물론 발해 유민들까지 품에 안았다. 고려가 새로운 민족문화를 건설한 바탕에는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룩하는 풍류문화가 있었다. 고려의 다원적 문화는 남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일구려는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다. 그 지혜의 한 자락을 춘궁리 석탑에서 찾으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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