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이름 짓기의 양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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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교정 곳곳에 연한 푸른 기운이 퍼져가고 산수유에 이어 개나리 진달래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듯 황량하던 풍경이 푸르른 기운과 알록달록한 꽃으로 되살아나는 모습, 특히 죽은 가지처럼 보이던 가지에서 움과 순과 싹이 터오는 기적(奇蹟)을 실감하는 나이가 어느덧 된 모양이다. 그 전에는 보여도 보지 않았고, 설령 본다 한들 기적을 생각해보는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새 봄 새 생명의 탄생에서 설레는 기적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다시 말해 늙어간다는 게 그렇게 서러워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개나리나 진달래는 알아도 여러 다양한 꽃들을 보며 이름이 궁금해지곤 한다. 나름 시골에서 자랐지만 꽃 이름은 많이 모른다.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한낱 몸짓이 의미 충만한 꽃이 되듯, 이름을 알면 그 꽃과의 만남이 더 깊고 넓은 의미의 장에서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대상과 의미 있는 관계의 장에 들어선다는 이야기고, 그런 의미에서 참 소중한 일이다 싶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레이코프)라고 하면 더더욱 코끼리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것이 이른바 ‘프레이밍(framing)’을 빗댄 비유다. 영화 ‘인셉션(inception)’에서는 상대방의 무의식에 생각의 씨를 심는 일을 ‘인셉션’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 무의식이 자라나 마침내는 그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좋은 프레이밍, 행복한 생각의 씨앗을 심어준다면 나쁠 것 없지 않을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같은 물을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고, 젖소가 마시면 우유가 된다던가? 그렇다면 그릇된 프레이밍과 불행한 생각의 씨앗이 될 수도 있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멋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어선 안 된다.

 

우리도 그런 일을 참 많이 겪었다. 좌파, 좌빨, 용공, 친북, 보수 꼴통, 분단 장사치… 특히 앞에 있는 쪽의 말들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 대상은 프레이밍에 갇히고 심지어는 옥에도 갇히고 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아직도 제대로 가시지 않았다. 일례로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이른바 ‘지공거사(地空居士)’도 저 부당한 이름 짓기와 프레이밍의 하나다.

그 이유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무임손실’이라는 말은 개념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회계에 애초 들어 있지도 않은 것을, 노인승객 수로 운임 곱해보면 3천 몇 백 억이 되니까, 그만큼 손실이라는 식일 뿐이다. 둘째, 복지제도를 비용과 손실의 측면에서만 바라본 결과다. 셋째, 게다가 노인들에 대한 인상마저 더 부정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실제 보지도 않은 손실을 노인 탓을 하여 사회적, 세대적 갈등을 만들면서까지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보려는 술수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다.

 

봄에 꽃을 보며 그 이름을 생각하다가, 이름 짓기의 폭력성에 이어 교통복지와 지공거사 문제로 새고 말았다. 그리고 나조차 이미 프레임에 갇혀버려 쓰지 않아야 할 저 이름을 두 번이나 부르고 말았다. 부르면 부를수록 독이 되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의미의 만남이 되어 서로 의미를 주고받게 하는 이름도 있다. 우리 스스로 의미를 주는 이름을 짓고 부르는 노력, 그리고 독을 퍼트리는 이름을 짓지 말고 있더라도 부르지 않는 노력 밖에 내겐 달리 길이 보이지 않는다.

 

김근홍 강남대 교수·한국노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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