龍의 건국 기세와 눈물 오롯이 새겨진 찬란한 유산
“…경신년(1380)에 우리 태조께서 운봉에서 싸워 이겨, 동남 지방이 편안하여졌다. 무진년에 시중 최영이 권간들을 주륙할 적에 지나치게 참혹하게 하였는데, 우리 태조의 힘을 입어 살아난 자가 자못 많았다.
최영이 태조를 시중으로 삼고, 이어서 우군 도통사의 절월을 주어 억지로 요동을 치게 하였다. 군사가 위화도에 머물렀을 때, 앞장서서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정의에 의한 깃발을 돌이켰다. 군사가 강 언덕에 오르자 큰물이 섬을 휩쓸어 버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최영을 잡아서 물리치고, 대신 명유 이색을 좌시중으로 삼았다. 바로 이때 권간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광패한 자들이 중국과 흔극을 만들어, 위망이 눈앞에 닥치고 화란이 헤아리기 어려웠었는데, 우리 태조의 돌이킨 힘이 아니었더라면 나라가 위태하였을 것이다.
…무자년 5월 24일 임신일에 태조께서 승하하니, 춘추가 74세이고, 재위가 7년이며, 늙어서 정사를 보지 않으신 지 11년이다. 갑자기 활과 칼만 남기시니, 아아, 슬프도다! 우리 전하께서 애모함이 망극하여 거상 중에 예를 다하였다.…”
비석에 새긴 이성계의 이력서
1408년 5월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왕릉 조성을 위해 풍수지리에 밝은 대신들과 지관들을 불러 한양 주변 80리 안에 최고의 명당을 찾도록 명했다. 총책임을 맡은 영의정 하륜(河崙)이 김인귀에게 양주 검암산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추천하자 태종이 승낙하고 박자청(朴子靑, 1357~1423)에게 산릉을 조성하도록 지시했다.
역군 6천 명이 동원되어 7월 하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9월 9일에 발인했는데, 이때부터 건원릉(健元陵)으로 불렀다. ‘건’은 하늘의 도, ‘원’은 나라와 도읍을 처음 세웠다는 뜻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때 능을 관리하는 개경사라는 원찰도 지었다. 건원릉 주변에 8기의 능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 조성의 감독을 맡았던 박자청은 이에 앞서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과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조성했던 경험을 가진 건축과 토목의 전문가였다. 특이하게도 건원릉의 봉분에는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덮여 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언에 따라 억새를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억새는 태종이 아버지의 고향 함흥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전해진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제1741호)과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비각 안에는 태종대에 세운 건원릉신도비(보물 제1803호)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2단의 대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고, 받침돌은 거북이 모양이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는 장방형의 몸돌을 얹고, 몸돌 위에는 용모양의 머릿돌이 위치했다.
300년 세월이 흐른 1790년 비각이 훼손된 것을 안 숙종이 비각 건립을 지시하여 이듬해 헌릉신도비의 비각을 참고하여 새롭게 완성했다. 1764년(영조 40)과 1879년(고종 16)에 정자각을 고치면서 비각도 함께 개수했다. 그리고 1900년(광무 4) 신도비 옆에 능표석을 추가로 세우면서 비각의 규모를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익공식 팔작지붕 건물로 확장하여 현재에 이른다.
신도비 비신의 앞면에는 권근이 지은 비문이 성석린의 단정한 해서체로 쓰여 있다. 비신의 상단 중앙에 새긴 전액이 ‘태조건원릉비’라 되어 있다. 비신의 뒷면에는 변계량이 짓고 성석린이 쓴 비음기가 새겨져 있다. 태종의 명으로 작성된 비음기에는 51명의 개국공신을 비롯하여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태종을 도운 22명의 정사공신과 1400년 태종의 즉위에 공을 세운 43명의 좌명공신 등 총 116명의 공신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태조의 건원릉 신도비에 태종을 도와 공신이 된 인물들의 명단을 새긴 것은 태종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함이다. 태종은 글씨를 쓴 성석린에게 공로를 표창하고 말을 하사하면서 “칠십이 넘었음에도 필력이 매우 뛰어나니 후세 사람이 보면 크게 탄복할 것”이라며 칭찬했다.
한 덩어리의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건원릉 신도비는 비석 양식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귀부이수를 갖추고 있다.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참여하여 조각이 매우 아름답고 섬세하다. 신도비의 이수는 태종무열왕릉비 이수 구도를 본받은 것으로 용이 비신 상단을 입에 꽉 물고 승천하는 형상이다.
태종무열왕릉비 이수가 좌우 각각 3마리씩 모두 6마리인데 건원릉 신도비 이수는 좌우 각각 2마리씩 총 4마리이다. 이수 중앙에 공간을 마련하여 비의 명칭을 전서로 쓴 점 또한 동일하다. 이처럼 건원릉신도비에는 신라와 고려, 당나라의 우수한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다섯 번째 용, 태조 이성계의 눈물
이성계는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이자춘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왕위에 오르면서 지은 이름은 단(旦), 호는 송헌(松軒)이다. 이성계는 손자 세종이 지은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해동육룡 중에 다섯째 용이다. 전주감영의 아전으로 있다가 야반도주하여 함흥에서 터전을 닦은 이안사가 해동육룡의 첫째 용이고, 마지막 여섯째 용이 태종 이방원이다.
이성계는 1356년 철령 이북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쌍성총관부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전장을 누비며 명성을 쌓다가 1380년 지리산 운봉전투에서 1만의 왜구를 대파하면서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른다. 이 무렵 이성계를 찾아온 정도전과 무학이 곁에 있었다.
1392년 7월 16일, 이성계는 개성 수창궁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여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오랜 전쟁으로 백성들이 시달렸으므로 군사 강국 명에 사대하는 외교정책을 채택하고, 숭유억불정책으로 유학자들의 환심을 샀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한 무렵에는 박자청처럼 신분이 천한 사람도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역동적 인 사회였다.
그러나 창업군주 태조의 정책에도 잘못이 있다. 태조는 개성에 기반을 둔 고려 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이 상공업을 경시하고 농업에만 매달려 가난을 벗지 못한 원인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또 하나는 문무를 겸전한 아들을 두고 겨우 11살의 막내 방석을 세자를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태조는 자식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비극을 지켜봐야 했고 왕좌까지 내려놓아야 했다. 태조는 둘째 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성계는 살아생전에 부인 두 명과 아들 8명 중에서 5명을 먼저 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조선 최고의 건축가, 박자청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 그리고 태조의 원비 한씨의 제릉과 정릉까지 조선 왕릉의 기본제도를 마련한 사람은 박자청이다. 태조에게 발탁된 박자청은 세종대까지 4대에 걸쳐 조선왕조의 중요한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했다. 경복궁 경회루와 창덕궁의 인정전도 박자청이 총지휘하여 만든 작품이다.
박자청의 스승은 김사행이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왕릉을 호화판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던 김사행은 태조의 비 강씨의 무덤인 정릉 공사를 맡았지만 왕자의 난에 연루돼 사사되었다. 뒤를 이은 것이 박자청이다. 천재 건축가 박자청은 고려와 조선의 건축을 잇는 중심인물이다.
<세종실록>에 실린 박자청의 졸기에 놀라운 그의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박자청은 1393년에 입직 군사로 궁문을 파수하다가 태조의 아우 의안대군이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대궐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얻어맞으면서도 문을 굳게 지켰다. 이 말을 들은 태조가 박자청을 호군으로 특진시켰다.
1406년에 중군 총제에 선공 감사를 겸임하면서부터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일을 관장하기 시작했다. 문묘와 문소전을 지었으며, 공조판서가 되어 제릉과 건원릉의 역사를 감독하였다. 박자청은 토목의 공역을 관장한 공로로 최하층 사졸에서 출발하여 1품의 최상층의 지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가 67세로 죽었을 때 세종은 3일간 정사를 보지 않으며 애도를 표했다.
동구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와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