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靑山要我以無語청산요아이무어)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蒼空要我以無垢창공요아이무구)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聊無愛而無惜兮료무애이무석혜)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현대인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이 아름다운 시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지은 것이다. 이 시의 창작 무대는 양주 회암사(檜巖寺)이다. 양주 회암사는 나옹화상과 아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고려 공민왕 13년(1364)에 나옹이 깨달음을 얻어 중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던 곳이며, 공민왕 19년부터 주지로 머물렀던 곳이다.
■ 쓸쓸하지만 풍성한 절터
경기 북부에 위치한 양주군 회암리 천보산 자락에 1만여평에 달하는 회암사터가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의 3대 사찰로 꼽히는 회암사는 지공화상, 나옹선사, 무학대사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승들이 머물며 대중들에게 무애(無碍)의 불법을 전파했던 곳이다.
회암사는 억불숭유 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후원을 입은 최대의 왕실사찰로서 귀한 대우를 받았다. 비록 지금은 당시의 건축물을 하나도 볼 수 없지만, 절터에 남아있는 초석과 발굴된 유물을 통해서 화려하고 웅장했던 회암사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니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지 1천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길을 따라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고, <원증국사탑비>에는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가 열세 살에 회암사 광지선사께 출가했다는 내력이 실려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를 보면 “고려 우왕 2년(1376)에 지공화상의 제자이며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화상이 삼산양수의 비기(秘記)에 따라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지었다”고 했다.
회암사의 절정은 나옹화상이 주지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1371년 공민왕은 신돈을 숙청하고 보우를 국사로 임명하고, 나옹화상을 왕사에 책봉했다. 이어 나옹에게 선종과 교종을 총괄하는 선교 도총섭에 임명하고 보제존자라는 존호까지 내렸다.
이때부터 나옹이 공민왕의 스승인 왕사(王師)로서 불교의 모든 종파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태조 이성계의 스승으로 조선 건국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무학은 나옹의 수제자였다. 나옹은 스승 지공의 당부대로 회암사를 중심 도량으로 만들기 위해 불사를 새롭게 중창했다.
▲ 토수
고려에 온 지공이 금강산을 오가면서 양주 천복산 기슭의 회암사에 들렀는데 회암사가 자신이 수학한 인도 나란타사의 분위기와 닮은 것에 감명을 받았고, 위치가 ‘삼산양수(三山兩水)’ 사이에 있다고 찬미했기 때문이다. 삼산은 삼각산을 양수는 한강과 임진강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지공이 죽어서도 고려를 잊지 못했다. 열반한 후에 그의 사리는 고려에 보내져 제자 나옹의 손으로 회암사에 안치됐다.
회암사 중창은 나옹화상의 주도로 공민왕 21년(1372)부터 시작돼 우왕 2년(1376)에 주요 건물이 완성됐다. 낙성식이 열리던 날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재상들의 회의기구인 도평의사사와 언론을 담당한 대간이 회암사 주지 나옹화상에 대한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에 크게 놀랐다.
고려의 귀족들은 나옹화상이 백성들의 편에 섰던 신돈처럼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군사를 보내 부녀자들의 회암사 출입을 금지하고 회암사로 가는 길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드디어 확실한 묘안을 찾아냈다.
도평의사사와 대간이 보낸 관리가 회암사를 찾아가 나옹에게 밀양 영원사로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나옹은 한강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몸이 아파 여주 신륵사에 들어가 쉬다가 그 곳에서 열반했다.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 공민왕과 손잡았던 신돈과 백성들에게 신망을 얻었던 나옹은 5년 간격으로 귀족세력에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 역사의 흔적들
나옹선사의 제자 각전이 남은 불사를 마쳤을 때 262칸에 15척의 불상이 7구, 10척의 관음상이 모셔졌다고 한다. 목은 이색은 <회암사 주조기>에서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해 동방에서 첫째”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회암사는 전국 사찰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데, 이때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도 회암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태조는 나옹의 제자이며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해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참례하도록 했다. 회암사가 영향력을 더하게 된 배경에는 고려의 도읍 개성과 조선의 도읍 한양이 가까운 곳에 위치했던 지리적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태조는 왕자의 난으로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이곳에 머물며 수도생활을 했다. 이처럼 회
암사는 왕좌를 놓고 자식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을 지켜봐야했던 태조 이성계가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유했던 곳이기도 하다.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도 이곳에서 수도에 정진했던 것을 보면 회암사는 조선왕실과 밀접한 사찰이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성종 3년(1472)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으며 다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이 됐다. 그러나 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가 처형되면서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때까지는 기록에 가끔 등장하다가 이후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인 형상의 잡상
■ 주춧돌과 막새기와에 담긴 꿈
당시 회암사는 크고 웅장하며 아름답기가 동국 제일로서 이런 절은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하고 있다. 선조 이후 폐사가 되고 말았지만 절터 주위에는 당대의 문화를 알리는 유물이 수두룩하다. 보물로 지정된 회암사지 선각왕사비(제387호), 회암사지 부도(제388호), 회암사지 쌍사자석등(제389호)이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제49호),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제50호), 무학대사비(제51호), 회암사지 부도탑(제52호), 그리고 향토유적으로 지정된 회암사지 당간지주(제13호)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있다.
나옹화상의 일생과 회암사의 내력을 상세히 기록한 선각왕사비는 1377년에 건립된 것으로 고려 말의 대학자 목은 이색이 비문을 짓고, 명필 권중화가 예서로 글씨를 썼다. 비신의 상단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했는데 화려하고 생동감이 있다. 예서체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에 처음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귀중하다. 유학자 이색이 나옹과 회암사의 내력을 기록한 비문을 지었던 것은 당시만 해도 유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열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무학대사 묘탑 앞 쌍사자석등은 회암사지 동쪽 능선 위에 있다. 용의 머리와 몸통은 매우 섬세하게 표현돼 생동감을 주며, 구름무늬 역시 뒤엉킨 몸통 사이에 빈틈없이 조각돼 역동감을 한층 더하고 있다. 무학의 스승인 나옹의 승탑, 나옹의 스승인 지공의 승탑이 나란히 서 있어 불문으로 맺어진 사제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회암사지박물관에는 회암사터에서 발굴한 진귀한 유물들이 가득하다. 지붕에서 악귀를 쫓았던 잡물부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반인반수의 인물상도 있고, 하늘을 승천하는 용이 양각된 막새도 있다. 여기에는 회암사를 건립하고 부도를 만들었던 고려와 조선의 목수와 석수, 장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깨어진 기와조각에서 문득 선조들의 열린 마음과 낙토를 꿈꾸었던 민중들의 열망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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