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배경을 보려면 그보다 9년 전인 1627년(인조5년) 발생한 일을 살펴봐야 한다. 당시 청의 전신인 후금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즉위한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 정책으로 후금을 배척하자,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되어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정묘호란을 일으켜 1627년 1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이 조선에 쳐들어왔다.
이에 인조는 강화(유수부 집무소 부근)로 피신했다. 결국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을 맺고 3월3일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조선 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침략 이유로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조건을 걸었는데, 우 교수는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 나라를 편들지 않고 조선 사정에 맞춰 실리를 취하는 독자적인 외교를 펼쳤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아마 세종대왕 다음으로 훌륭한 왕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후 1636년(인조14년)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조선에 대하여는 형제에서 군신의 관계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조선에서 답하지 않자 다시 침공을 하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청나라와 조선 관계를 보면 인조 때 김상헌을 중심으로 청나라를 치고 명나라와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척화파(斥和派)와 주변상황과 조선의 현실 여건을 고려, 청나라와 화해를 중시해야 한다는 최명길을 중심한 주화파(主和派)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인조는 어쩔 줄 몰라 강화도로 피신하려 하였으나, 이 소식이 청에 알려져 강화도로 이르는 길을 봉쇄하자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후 47일간 항쟁 끝에 결국 항복, 삼전도(서울 송파구) 굴욕을 당하고 형제의 국에서 군신관계로 바꾸게 된다. 이러한 조선의 국론분열이 청나라의 침입 명분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욱이 정묘호란을 겪었으면서도 그동안 제대로 대비책을 세우지 못했던 인조의 무능함이 보이고 위기상황에서 우유부단하며 그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리는 무책임도 보였다.
우 교수는 침략원인 제공으로 척화파 주화파 갈등 외에도 “평안도지역의 민심의 이반으로 일부 조선인들이 침략의 선봉에 앞장서 별 어려움 없이 서울을 점령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서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분들의 위패를 봉안한 ‘충렬사’가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371번지에 있다. 대부분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순절한 병조·이조판서를 지낸 김상용,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충신들이다.
우리 인천은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 앞장서 나라를 지키는 애국충절의 지역이라는 사실을 뿌듯하게 생각하며 그 뜻을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좋은 기회였다.
김성호 인천시립박물관 검단선사박물관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