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경제] 영화 ‘남한산성’과 인문학 대중화

▲
올 추석 흥행작인 영화 ‘남한산성’은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47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식소리를 들으니 필자만 심란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관객들이 한숨을 내쉰 이유는 짐작컨대 380년 전 강대국 사이에 낀 채 나라의 운명을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던 병자호란의 난맥상이 다른 형태로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과거 사실을 오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작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교훈이자 길잡이와 같은 역할을 한다. 역사에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과거의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국가에 더 이상 희망찬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소통해야 하고 그 소통이 미래와 연결돼야 한다. 이 점이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대한민국은 인문학의 새로운 부활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인문학의 가치에 눈을 뜨고 있다. 지자체와 기업은 물론 대학병원, 로펌, 군부대 등에서도 자체적인 인문학 공부모임을 하는 등 인문학을 배우고자 하는 열기가 매우 뜨겁다. 청년층은 교양함양과 앞으로의 삶의 방향을 잡기 위해 인문학을 배우려고 한다면, 중장년층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좀 더 풍요롭고 가치 있게 살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또 얼마 전부터는 인문학이 예능과 만나 공진하고 있다. 연예인들의 일상을 지켜보는 리얼 버라이어티나 기존 토크쇼에 식상한 대중들이 인문학을 예능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어렵게만 느껴졌던 인문학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한 것이다. 방법이야 어떻든 대중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려고 하는 움직임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하지만 정작 인문학의 거점이자 버팀목이 돼야 하는 대학사회에서는 오히려 인문학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태다. 그 동안 대학제도에 갇힌 인문학 연구는 연구자끼리만 아는 어려운 전문용어로 도배된 논문에 갇혀있을 뿐 대학이라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부족했다.

또한 전국의 사학과, 철학과, 각종 어문학과 등 인문학 관련학과는 저조한 취업률로 인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학과의 존망을 취업률이라는 획일화된 잣대로 평가하다보니 대학 안에서는 인문학 관련학과의 축소 및 폐과 논란이 거세지고 있고, 대학과 구성원의 고민과 번뇌는 점점 더 깊어갈 뿐이다. 인문학 발전의 기반이 대학의 교육과 연구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학의 인문학 위기는 곧 우리 사회의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인문학 대중화’가 정착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학 내에서 인문학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를 장려하는 분위기와 타 분야들과의 융합연구가 필수다. 또 이렇게 생산된 인문학 지식이 연구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강연, 저술, 소셜미디어, 모바일 등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재탄생해야 한다.

그 동안은 국내 유일의 인문학 연구 지원 기관인 한국연구재단이 인문한국지원사업(HK), 중점연구소지원사업 등 지원을 통해서 사막화된 대학의 인문학 연구에 있어 의미 있는 마중물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인문학 대중화를 논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 인문학의 대중화와 건전한 인문학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대학과 지자체, 기업, 정부가 함께 위기의식을 가지고 서로의 역할과 책임(Role and Responsibilities)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주목받는 기술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고 의미 있지만, 기술 자체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모습까지 알려주지는 못한다. 현재 인류는 여태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만 한다. 사람을 가치의 중심에 두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삶의 통찰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에 대한 제대로 된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배재석 경희대 중국어학과 교수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