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가을을 사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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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성큼 왔다.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느껴지면서 몸과 마음을 휘감는다. 평소 잘 통제되고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감정들이 가을 바람이 불면 이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속절없이 휘둘린다.

 

또한 감정이 과잉된다. 그리움, 고독, 쓸쓸함,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불안함, 유한한 삶에 대한 허무함과 두려움,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름의 뜨거운 태양이 모든 사물을 녹여버릴 듯이 작열하면 우리의 이성과 두뇌는 잠시 휴지기에 들어가고 먹고, 자고, 쉬는 매우 심플하고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 더위에 지쳐 걱정과 잡동사니 생각들을 잠시 내려놓으니 정신건강에는 훨씬 좋을 터다.

 

어느 날 문득 찬바람이 불면 그동안 더위에 지쳐있던 육체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벌써 시시각각 다가올 겨울을 생각하니 마음이 분주해지고 조급해진다. 한 해의 마지막 계절인 겨울로 향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여정, 즉 죽음이 연상되는 것이다. 여름 내내 뜨거운 햇빛과 더위와 싸우면서 뜨거운 태양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현재의 삶이 어느 날 한 줄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의해 균열이 생기고 인생의 유한함을 명징하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겨울이 생겨나게 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 페르세포네를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가 납치해가자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방방곡곡을 누비는 한편 그리스 전역에 저주를 내려서 모든 농작물을 말라죽어가게 만든다. 보다 못한 제우스의 명령으로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돌려보내지만 석류를 먹여 그녀를 지하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페르세포네는 8개월은 땅에서, 4개월은 지옥에서 하데스와 살게 된다. 딸을 너무도 사랑한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가 곁에 있는 동안은 모든 식물이 풍요롭게 자라게 했지만 딸이 지옥으로 돌아간 4개월은 슬픔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땅이 메마르고 얼어붙는 겨울이 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4계절이 생겨난 내용이다.

 

데메테르에게는 그토록 사랑하는 딸이 없는 4개월은 죽음과도 같은 암흑의 삶이었을 것이다. 딸이 지옥으로 돌아갈 날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날부터 고통과 슬픔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마치 찬바람이 이제 불기 시작할 뿐인데도 추워질 겨울을 앞당겨 걱정하거나 유한한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우리의 자화상처럼.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겨울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다.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땅 위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고 삶은 계속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사계절 중에서 유독 가을을 앓는 근원적 이유가 고대 그리스 신화와 닮아 있다.

 

이국진 칼럼니스트·커뮤니케이션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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