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면 풍성해진 마음만큼 추석에 대한 다양한 얘깃거리가 사람들의 대화를 즐겁게 한다. 고향에 오다 차가 막혀 고생한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옆집 아낙네의 기구한 팔자까지 별별 얘기가 상을 가득 채울 즈음 나도 하나 얘기를 보태본다.
왜 제사상에는 복숭아를 올리지 않을까? 이런 얘길 들으면 복숭아 안 올라가? 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바나나며 파인애플 같은 외국 과일도 제사상 한자리를 차지하지만 복숭아는 제사상에 자리가 없다.
이 사연의 주인공은 달에 산다고 알려진 달의 여신 항아(姮娥)와 신궁이라 불리는 예()라는 사나이다.
예는 태곳적 어느 날 태양이 10개가 떠올라 땅에서 연기가 나고 바닷물이 말라붙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곤륜산 꼭대기에 올라 9개의 태양을 활로 쏘아 떨어뜨린 세상을 구한 영웅이다.
이후 예는 백성을 괴롭히는 괴물과 귀신들을 하나같이 활로 쏘아 죽이며 온 세상의 존경을 받게 됐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항아와도 결혼해 성공한다. 이런 덕이 하늘에까지 알려져 예는 하늘나라의 황후로부터 먹으면 바로 신선이 된다는 불사약까지 선물받지만 부인과 헤어지기 싫어 항아에게 그냥 맡기게 된다.
주인공이 행복하기만 한 얘기는 없는 법. 어느 날 예가 집을 비운 사이 예가 가장 아끼는 제자 봉몽이 찾아와 불사약을 내놓으라 항아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놀란 항아는 불사약을 건네는 척하다 자신이 삼켜버렸다. 신선이 된 항아는 하늘나라로 가면 노여움을 받을까 두려워 땅과 하늘의 중간인 달에 내려 살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예는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고 봉몽을 찾아 나서지만 결국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 안방에 숨어 있던 봉몽이 나무 방망이로 예의 머리를 내리쳐, 결국 예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활 하나로 세상을 구하고, 귀신을 때려잡던 영웅의 최후치고는 좀 허무하긴 하지만 예는 죽어 귀신들의 왕이 됐다.
그런데 봉몽이 예를 죽였을 때 쓴 방망이가 복숭아나무로 깎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귀신의 왕이 된 예도 복숭아나무만 보면 무서워 멀리 도망갔다고 한다. 이런 사연이 세상에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제사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게 된 것이다.
추석에 달을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예와 항아의 사연에서 비롯됐는데, 집에 돌아온 예는 시녀들이 알려준 항아의 사연을 듣고 비통함에 쌓여 하늘을 향해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때 유난히 밝은 달 속에 움직이는 그림자를 본 예는 그림자의 주인공이 항아라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항아가 평소 먹던 음식과 과일, 과자 등을 차려 놓고 달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예와 항아가 사람들의 곁을 떠난 후 백성은 달이 유난히 밝은 추석에 제사를 지내게 됐고, 혼령들이 도망갈까 봐 제상에 복숭아를 올리지 않게 됐다고 한다. 주변에 보면 복숭아나무를 집안에 절대 심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다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 있어도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에 눈과 정신이 팔려 대화가 없어지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긴긴 겨울밤 ‘옛날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에’로 시작하던 할머니의 얘기가 그리워지는 요즘. 이런 얘기 하나쯤은 추석상에 올리는 것은 어떨까 싶다.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풍요의 절기지만 유독 홍동백서의 지위를 받을 수 없는 복숭아의 신세를 생각하면서, 풍성함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이웃은 없는지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이창수 경기관광공사 경영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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