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일본 제일생명경제연구소가 55세~75세 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결혼한 아들이나 딸의 부탁으로 손주를 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66.4%이고, 아들이나 딸과 동거 또는 30분 이내 거리에 사는 경우는 그 비율이 80% 이상 된다.
2차 대전 후에도 한동안은 일본에서 아들 부부는 밖에서 일하고 조부모가 육아나 가사를 돕는 라이프스타일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면서 미국식으로 부모가 직접 아이를 키우는 방식이 권장돼 사회적으로 정착됐다. 지금 손주들을 돌봐야 하는 조부모들은 미국식 육아를 실행했던 첫 세대다.
이 세대는 일과 육아로 분투해온 끝에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은퇴해서 겨우 자유와 여유를 얻었는가 싶었는데, 이젠 손주 키우기에 그 여유를 빼앗기는 처지가 되었다. 건강하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수명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손주 육아로 행동을 제한받는다는 욕구불만으로, 마음이 우울해지고 부정적으로 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이래서 ‘손주 피로(孫疲れ)’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맞벌이 젊은 부부들 입장에서는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으로 역시 부모들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저출산 대책에 고민하는 일본의 공공부문도 조부모를 육아 관련 인적자산으로 중시하는 듯하다. 그래서 일본 정부나 각 지자체는 조부모와 동거하는 주택으로 개축하거나 신축하는 경우 자금지원 등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조부모 세대와의 동거가 젊은 세대의 육아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권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에 대해 부모의 마음에 편승해서 조부모에게 육아를 일임하려는 정부의 인식을 보이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진지하게 저출산 대책을 추진하려면 영유아보육제도를 정비하여 아이 키우기를 더욱 사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 서울 서초구에서 손주를 돌본 할머니에게 월 36만원을 지급하는 ‘손주 돌보미 사업’이 도입되고, 그 후 이를 여성가족부가 전국적으로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나, ‘조부모가 손주를 돌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데 정부가 아예 영유아 보육책임을 조부모에게 강요하려 한다’는 비판이 들끓어 백지화된 바가 있다.
조부모의 손주 돌보기는 사적으로는 물론 공공 차원에서도 중요한 혜택을 제공한다. 그러나 손주 돌보기는 대체로 조부모들의 건강과 복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구미의 많은 연구결과가 지적한다. 앞서 언급한 일본의 연구소 조사에서도 조부모들의 70% 이상이 손주 돌보기는 자식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지만 힘에 벅찬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조부모의 손주 돌보기는 육아 대책 차원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조부모의 건강과 복지라는 관점에서도 손주 돌보기 피로나 부담을 줄이는 대책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일본 전문가는 제언한다.
서형원 前 주크로아티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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