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말기 병들고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했던 다산의 정치적인 뜻은 산산이 좌절되었다.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에 왔을 때 사람들은 그의 집 울타리를 무너뜨리며 그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냈고, 아무도 말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간신히 주막의 방 한 칸을 빌려 궁핍하게 살아야 했다.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로 자신의 정치적 인생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아버지며 남편으로서의 삶이 통째로 날아간 터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절망적인 역사앞에서 원망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마음을 새롭게 다잡았다.
“나는 이제야 독서할 시간을 얻었구나. 축복이다.” 그는 긴 유배생활동안 500권이라는 방대한 책을 집필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후세사람들에게 죄인 정약용이라는 기록만 남겨지리라는 생각에 깊은 회한이 들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증명해야 했다. 세상을 개혁하려던 그의 생각들을 정리해서 백성들과 후세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가 방대한 책을 편찬한 이유다.
또 다른 집필의 이유는 사랑하는 아들들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는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피 끓는 심정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는 것은 눈앞의 근심을 잊어버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내가 남의 아비가 되어서 너희들에게 이처럼 누를 끼치는 것이 부끄럽고 그래서 내 저술로서 너희들에게 속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아들들에게 당당한 아버지, 후세에라도 제대로 평가받는 아버지로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전 즈음을 살았던 중국 최고의 역사가다. 3천년에 걸친 방대한 중국 역사를 130권에 담은 중국 역사서 ‘사기’의 저자다.
직언하다가 한나라 황제인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그의 나이 47세에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선고받아 49세에 남자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생식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가 궁형을 자처한 이유는 자신이 반역죄로 사형을 당했다는 기록이 후세에 전해질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또 오래전부터 집필해왔던 사기를 완성해야 했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그가 옥살이를 하자 달라진 사람들의 인심을 깨닫고 인간의 본질, 권력의 본질에 대해서 끊임없이 통찰하는 계기가 된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수모와 좌절, 한 맺힌 울분과 분노를 승화시켜 혼신의 힘을 다해 사기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정약용과 사마천. 이 두 비운의 위인은 절망적인 운명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남아 위대하고 불멸의 저서를 남긴다. 이들은 수천년, 수백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영감을 주고, 삶의 본질과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국진 칼럼니스트·커뮤니케이션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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