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월19일 1시 09분. 나는 현역 군인으로 강원도 화천 해산 1천140m 고지에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 속 칠흑같이 어두운 밤 산 속에서 흰 셔츠만 입고 떨고 있었다. 당시 나는 강원도 00사단 00연대 통신대 소속 일등병이었다.
사건 전날 인접 사단과의 통신망에 문제가 생겨 홍 중사와 오 병장, 나와 김 일병 4명은 복구 작업에 나섰다. 일행은 소총과 전화기, 통신선로 수리 장비를 휴대하고 길을 떠났다. 며칠 전 훈련으로 잠을 못 자 몸 상태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홍 중사가 복구 작업에 나섰다.
평소 말없이 솔선수범하는 선임하사였다. 그 날 일정은 산을 넘고 북한강을 건너 양구까지 갔다 오는 일이었다. 통상 1박 2일이 소요되는 길이었지만 그날은 당일로 갔다 와야만 했다. 산을 넘고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 양구 인접 사단 지역까지 갔다. 통신선 복구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귀대 길에 올랐다.
서둘러야 어둡기 전에 산을 넘어 민통선 신작로에 닿을 수 있었다. 1월의 겨울은 해가 짧아 오후 4시가 지나면서부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길을 헤쳐 가며 해산을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 중사가 “쉬었다 가자”며 “군대생활 중 오늘이 가장 힘든 날이다”고 힘들게 말하였다. 누적된 과로 후유증이 나타난 것 같았다.
그렇게 쉬었다 가다를 몇 번을 반복했을까. 어느 때부터 그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홍 중사를 밀고 끌고 하면서 산을 올라갔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정상까지 겨우 오를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깜깜한 밤이 되었고, 그 때 홍 중사는 바닥에 쓰려져 몸을 가누질 못했고 말도 못하였다.
그곳 지리에 밝은 오 병장이 구조대를 부르러 가겠다며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남은 사람은 나와 김 일병. 둘은 쓰러져 있는 홍 중사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야전잠바와 동내의를 벗어 그의 몸을 감싸 주물렀다. 의식이 사라져 가는 홍 중사의 몸을 흔들면서 인공호흡도 시도하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산 밑쪽에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연대본부 의무대에서 구조팀이 온 것이다. 나는 이제 ‘살았다’, ‘살렸다’고 안도하였다.
야전 침대에 실려 내려간 홍 중사를 얼마 후 산 아래 신작로에서 의무관이 검사를 하였다. 그 때 홍 중사는 이미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를 살리려고 끝까지 애를 썼던 나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다. 너무 허망했다. 그가 그렇게 죽은 뒤 며칠 후 그의 비석을 세우기 위해 시멘트 포대를 짊어지고 나는 다시 그 곳 해산 고지에 올랐다. 그를 위해 ‘해산 위에 핀 꽃’이라는 순직시를 써 올렸다.
마지막까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맡은 업무에 충실히 사명을 다했던 故 홍성준 중사. 그의 시신을 덮은 관 뚜껑에 못을 박아주고 쓴 소주 한잔을 올렸던 것이 그와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매년 6월 현충일이 오면 고 홍 중사의 묘지를 꽃 한 송이 들고서 찾아간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고 새로운 각오를 한다. 올해도 그의 묘비 앞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다짐을 할 것이다.
김유성 죽전고 교장·용인시 교원총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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