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교 36개 일반학급과 별도로 통합교육을 받는 특수학급 몇 몇 아이들을 보면 나 역시 지체장애를 앓아서인지 유난히 정이 가는 얼굴들이 있다. 직업교육의 일환으로 바리스타 활동시간에 자신이 만든 커피를 내게 맛보이고자 불편한 몸으로 손수 챙겨와 칭찬을 받고 행복해하는 아이의 표정이 참 예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 날개를 지닌 순간 인간은 비상(飛上)을 꿈꾼다. 그러나 종말은 해피앤딩이 아니다. 끝없는 욕망의 덫에 걸려 결국 추락한다는 교훈이 아니었던가. 굳이 80년대 연애소설 제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장애아들은 늘 세파에 적응하기 위해 조심스런 날개 짓을 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처럼 더욱 높이 날고자 추구하는 그런 욕망의 날개 짓이 아니며, 태양마차를 몰다 통제력을 잃고 추락한 태양신의 아들 파에톤과 같은 허황된 욕구도 아니다. 일찌기 자신이 지닌 숙명을 알고 불편한 삶을 오직 우직한 성실을 통해 극복하고자 오늘도 쉼 없는 날개짓 하는 해맑은 아이들이다.
흔히들 장애인과 대비개념으로 ‘일반인’, ‘정상인’이라고 말한다. ‘장애인’이란 비단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 만을 일컫는 말일까? 보통사람은 ‘일반인’이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사람은 ‘정상인’일까? 그렇다면 장애인은 보통사람이 아니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일까? 도대체 정상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어려운 일 앞에서 도전을 회피하며 안 된다는 패배의식을 지니고 스스로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야말로 정작 장애인이 아닐까? 엉키는 생각의 결론은 차별을 염두에 둔 언어적 표현이 잘못된 것으로 이제부터는 ‘장애’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쓸 경우 ‘비장애’라는 말을 일반화시켜 그릇된 편견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데 이른다.
갑자기 ‘십자가의 무게’라는 교훈을 주는 글이 생각난다. 불만에 찬 어조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항의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말했다. ‘저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의 무게를 달아 보아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제 각자 지고 있는 십자가를 모두 달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큰 십자가도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같았다. 아무 말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말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누구에게나 똑같은 무게의 십자가를 주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쇳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살고 있지 않느냐.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받아 들이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똑같은 달란트를 평등하게 부여했음에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에 따라 삶에 미치는 영향은 왜 그렇게 크게 나타나는지. 그렇다면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야말로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아닐는지 되새겨 볼 일이다.
이 세상에 온통 자신만이 불행하다고 느낀 사람이 있다면 이제 주위를 돌아보라. 장애의 고통마저도 사랑하며 순수히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극복하고자 애쓰는 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가. 불편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채워 가며 자신의 소중한 삶을 위해 쉼 없이 노력하는 저 생동감 넘치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말 경이롭지 않은가.
최동호 용인 성복고등학교 교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