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고인이 그렇게 긴 세월을 거동을 못하시고 자리에 누워서 투병하셨는데 긴 병마와 싸우는 동안에도 늘 즐겨 부르던 찬송가 410장이다.
최근에는 목을 수술하셔서 말씀도 못하고 의사소통은 눈빛으로만 했는데도 이 찬송을 불러 드리면 좋아하시고 눈물을 줄줄 흘리곤 하셨다.
긴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소망 중에 찬양 할 수 있는 것, 은혜 받은 믿음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 일게다.
고통 중에서도 찾아와 주는 사람들에게 해 맑은 미소를 보내 주고 마음 불편하지 않게 해 주려고 애쓰던 모습이 선하다. 고인은 언젠가는 병마에서 놓여 건강이 회복되어 이 땅에서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살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남은 날은 계수 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준비하면서 지냈다.
돌이켜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고인의 얼굴은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이 귀중히 보시는 도다(시116:15)라고 하신 것을 아닐까?
은혜 받은 성도는 죽음을 알고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삶이다.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죽음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성도의 삶은 아름답다. 왜 인생을 아무렇게 사는가? 왜 죄를 무서워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는가? 두 가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또 하나는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것을 모른다.
호스피스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 목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이제 생을 몇 개월 남겨 놓지 않은 말기환자들이 입원해 있으면서도 유한한 인생을 모르고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에 호스를 끼운 채로 장부책을 들여다보면서 돈을 세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병동에 근무하는 얼굴 예쁜 간호사에게 마음을 두고 추군 거리는 환자도 있다고 한다.
양로원 사역을 하는 친구목사의 말을 빌리면 그곳에 계신 노인들도 어린아이처럼 싸움을 한다고 한다. 믿음의 은혜를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하며 서로 미움과 갈등을 빚는다는 것이다.
믿음의 은혜는 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의 은혜는 마치 숙제를 다 해놓고 나가서 노는 것 같아서 기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다음날 학교 가는 길이 발걸음이 가볍다.
봄아, 봄아 오너라/ 봄이 되면 나는, 나는 새로 사학년/ 유리창을 호 호 /썼다가는 지우고 또 써보는 글자들/ 봄. 꽃. 나비.
내 어린 시절 초등학교 삼학년 이 학기 국어 교과서 끝 부분에 나왔던 글이다.
이제 해도 바뀌고 계절도 바뀌어 새 봄이 왔다. 따듯한 기운이 대지위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계절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길이가 아니라 깊이이다.
봄 햇살이 곱게 비취는 창가에서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새 생명의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드린다.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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