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정유재란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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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을 지나면서 정유년(丁酉年)을 새삼 느낀다. 금년은 12지 간지로 60년 만에 찾아오는 정유년으로 420년 전 정유재란(1597)의 7주갑이 되는 해이다. 임진왜란(1592~1596)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유재란(1597~1598)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일부로 생각하여 관심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

 

임진왜란이 일본군에 의해 침략을 당한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승리의 전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은 모두 정유재란 중에 일어난 전쟁이다.

 

임진왜란이 경상도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전라도(호남) 전쟁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의 일본군은 임진왜란의 종전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 재차 조선을 침공하였다. 도요토미는 반드시 전라도를 점령 호남지방을 장악할 것을 명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신념으로 바다에서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막았다.

 

조선을 재침한 일본은 정보전을 통해 조선 조정을 교란시켜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는 데 성공한다. 일본군은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시키고 일거에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일본군은 계획대로 남원과 전주성을 함락 호남을 점령하였으나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에 의해 북상이 저지되었다.

 

전쟁이 뜻대로 안 되자 일본군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양민을 납치 학살하고 전승의 증거로 코와 귀를 베어 가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은 대부분 전라도에서 베어 온 코와 귀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정유재란(丁酉災亂)으로도 부르고 있다.

 

1597년 9월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명량(鳴梁)해전에서 소수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막아내는 기적적인 승리로 일본군을 다시 공포에 떨게 하였다.

사실 선조는 원균에 의해 수군이 궤멸한 것을 전해 듣고 수군의 해체를 지시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로 선조를 설득했다. 이순신 장군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리더십과 민초들의 활약으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의 사망으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의 철수 명령이 떨어진다. 순천 왜성에서 철군을 준비 중이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군을 봉쇄하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군을 엄호하러 광양만으로 들어오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군을 노량(露梁)에서 맞이하여 대패시켰다. “전황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금년 정유년은 국내외 상황이 어려운 한 해가 될 것 같다.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일본의 아베(安倍晉三) 총리 등 근육질의 지도자로 가득 찬 동아시아의 지정학은 약육강식의 정글로 변해 가고 있다. 오리무중(五里霧中)의 국내외 정세 속에서 나라는 탄핵 정국과 대선 정국으로 분열되고 있다.

 

정유재란을 재조명하여 420년 전 국난 극복의 역사에서 오늘의 내우외환(內憂外患) 위기를 벗어나는 지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유주열 前 베이징 총영사·㈔한중투자교역협회자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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