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종교] 어머니 품 같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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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육전도사 시절 강원도에서 서울로 통학하면서 신학교를 다녔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바로 서둘러 아침 첫차를 타고 상봉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와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길고도 먼 훈련 기간이었다. 하루에 네다섯 시간을 자동차 안에서 보내야 했기에 그 시간을 공부시간으로 이용해야만 했다.

 

하루는 성경을 펴서 말씀을 읽으며 묵상 중에 갑자기 뒷자리에서 콜라병 따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내 뒷머리에다가 쏟아 붓는 뜨끈한 것이 있었다. 확인할 겨를도 없이 밀려오는 냄새와 함께 온통 버스 안에는 소동이 벌어졌다. 내 뒤에 탄 시골처녀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 가는 길이었는데 차멀미가 나서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내 머리에다가 토악질해 놓은 것이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당사자인 처녀는 울기만 하고 그 옆자리에 어머니는 딸의 등을 두드려 주면서 얼굴을 닦아주느라고 열심인 것 아닌가? 그 당시는 시외버스에 안내양이 있을 때라 달려온 안내양이 보기에 딱했던지 수건을 가져다가 얼굴을 닦아주는데 나중에 보지 유리창 닦는 걸레였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주님은 내 마음에 은혜를 주셨으니 참으로 찬양받으실 좋으신 분이시다. 그 처녀에게 그때보다 더 황당하고 난처한 상황이 있었을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곁에서 그녀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큰 위로자요, 산성이며, 요새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믿고 울기만 했는데 나머지는 어머니가 모두 알아서 수습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내 어린 시절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눈물이 핑 돌면서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시골도 보통 시골이 아니라 자동차는 물론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산간벽지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게다. 6·25때에도 우리 고향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인민군도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 읍내로 시집간 이웃집 딸네가 피난 와 있다가 사위가 집이 궁금해서 잠깐 다니러 가다가 인민군한테 붙들려 그 마을로 불러 드리게 되어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지금처럼 한여름에 먹을 만한 과일이 흔하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돼도 개울에 가서 멱 감고 놀다 보면 배는 출출한데 먹을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지금은 참외, 수박도 많이 있고 복숭아 자두도 흔한데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 동네 전체에 자두나무 두어 그루 있었다.

 

나는 6남매 중 다섯 번째이다. 우리 형제들은 여름이면 아직 익지도 않은 아니 자라지도 않은, 아니 겨우 꽃잎이 떨어진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자두를 따 먹곤 했다. 그런 여름밤이면 여지없이 한밤중이면 토사 광란이 나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곤 했다.

 

“배 아파 죽는다”고 데굴데굴 구르면 어머니는 벌써 알아차리고 “너 낮에 무얼 먹었느냐?”라고 하신다. 어머니는 강제로 손가락을 입에 넣으셔서 토하게 하셨다. “토해라. 토해야 산다.” “억”하고 엄마 치마폭에 토해놓으면 엄마는 등을 두드리면서 “이젠 좀 괜찮으냐?” 시며 등을 두드려 주시곤 하셨다. 치마폭에 토해 놓은 것 보시고 더럽다고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라 등을 다독이면서 토하게 하시고 토종꿀 한 술 물에 타서 먹여주시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교회를 어머니라고 한 바울과 종교개혁자 칼빈의 표현을 좋아한다. 그렇다. 교회는 어머니의 품이다. 답답하고 힘든 이야기를 어디 가서 토해 놓을 것인가? 누구에게 토해 놓을 것인가? 어머니는 더럽고 냄새 나는 것도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도 상처 나고 아픈 것도 치우시고 가리시고 싸매시는 사랑이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교회는 어머니 품이다. 어머니 앞에 모두 토설하자. 억울해도 답답해도 어머니 앞에 토설하자. 그리고 어머니가 주시는 순수한 말씀의 꿀 한잔으로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자.

반종원 수원침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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