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용서의 길

용서.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살면서 정서적, 심리적, 정신적, 영적 관계에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치유하려면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용서는 결코 쉽지 않은, 참으로 어렵기도 하다. 그것은 상대방이 뉘우치고 있다는 것을 아예 안 믿거나, 조금밖에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의 논리를 안 믿고, 서로 화해됨을 안 믿으며, 용서하고, 용서받는 일이 가능함을 안 믿기 때문이다. 아니면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지만 자기만 손해 본다는 느낌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용서한다고 하면 그저 잊어버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체한다. 벌을 주거나, 감해준다. 약자의 입장이 되거나, 도량이 넓은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발적이고, 소극적인 체험이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화해를 주고받는 일이고, 우연히 발생하는 지엽적인 사건이지 사람의 내면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상대방이 한 행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어리석게도 상대방이 저지른 잘못이 큰 잘못이 아니라는 뜻을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마음의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상대방의 잘못을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잘못이나 죄의 성격과는 관계가 없다. 용서는 분노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축복하고, 그 잘못을 사랑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에게 초라함보다 더 큰 것을 넣어준다. 그렇지만 그 초라함을 무시하고, 멸시하거나, 짓밟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소생시키고, 살려준다.

그것이 전에는 폐품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인간을 건설하는 재료가 된다. 전에는 수치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는 모체가 된다. 전에는 죽음이었지만 지금은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그래서 용서에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사랑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어야지 뾰로통한 얼굴과 지친 심정과 포기의 마음으로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살면서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형태의 모순된 감정과 일들로 서로 상처와 아픔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모순된 감정과 일들에 의하여 밀려드는 ‘충돌의 문화’가 ‘화해의 문화’로 바뀔 수 있도록 용서의 영성을 키워갔으면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 안에 상처와 아픔이 있지만 동시에 이웃과 세상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는 치유자들이 되었으면 한다. 아픔과 상처의 책임을 서로 덮어씌우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용서의 길이고, 화해의 길이기 때문이다.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물으신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 21).

 

박현배 천주교 성 라자로마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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