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지천명에서 이순으로 가는 길

“예순에 이르니 귀가 부드러워졌다(耳順).” 굳이 생각지 않아도 뜻을 알고 아무리 고까운 얘기라도 거슬리지 않는 경지를 일컫는 말일 테다. 요즘 말로 ‘소통’이겠다. 경청하는 태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 말이다. 잘 들어주고 잘 알아차리니 막히는 데가 없고 답답하지도 않다.

이야기가 흐를수록 헤아림이 깊어가고 깨달음이 늘어난다.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우며, 서로 살리고 서로 키우는 이야기 한마당,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네 삶이 얼마나 즐겁고 후련할까.

 

소통하자면 앎이 필요한 듯도 하다.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정보도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귀 막고 눈 감은 채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야멸스레 내치는 지식인, 전문가가 얼마나 많은가.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야고보서 1장 19절)고 하였건만, 알량한 지식과 정보로 남의 입을 틀어막고 애오라지 자기 말만 쏟아내는 선생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앎이 귀를 부드럽게 하지는 못하나 보다.

 

예순이 곧 이순(耳順)이면 좋으련만, 나이가 들수록 외려 작은 일에도 앵돌아지고 배틀어지기 십상이다. 노여움도 잘 타고, 어린 사람 얕보고 뭉개기가 예사다. 그러니 예순이라고 곧 이순일 수는 없다. 이름이 알려지고 자리가 높아진다고 해서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더욱이 없다. 그 무슨 벼슬이라도 할작시면 소통은커녕 교시(敎示)하고 위세 부리기 바쁘다.

 

사정이 이럴진대, 배울 만치 배운 데다 나이 많고 높은 자리까지 꿰차고 있는 사람일라치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오로지 자기 생각, 자기 말만 고집하고 거기에 터럭만큼이라도 토를 달라치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악패듯 짓밟던 사람들, 이제는 ‘불통’의 표상이 되어 온 나라의 비웃음을 사며 이 나라 사람들을 죄다 부끄럽게 만든 이들, 그들에게 알랑거리며 언구럭스레 ‘아랫것’들의 무지를 꾸짖어 온 사람들, ‘이순’은 좀체 보이지 않고 표독스런 ‘예순’들만 여기저기 수두룩하다. 이야말로 이 나라, 이 사회의 비극 아닌가.

 

정보화로 지식이 넘치고 고령화 탓에 나이든 사람 또한 넘쳐나지만, 정작 고까운 얘기 마다않고 귀 기울여 주는 이순은 드물다. 짐작컨대 이순의 세계는 나이 들고 지식 쌓인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늘의 뜻’을 알 때 열린다. 그래서 성인은 “쉰에 이르러 하늘의 뜻을 알았다(知天命)”고 하였나 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만들어 온 ‘나’를 포기하고 눈길을 ‘하늘’로 돌리라는 뜻일 테다. 하늘이 또한 내 안에 있으니(누가복음 17장 21절), 나를 깊이 들여다보고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말이기도 하리라. 하여 지천명(知天命)은 하늘에 비추어 자기를 알아가고, 하늘의 뜻에 오롯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이다. 오늘 우리 사회의 참상은 ‘나’를 찾기보다 ‘내 것’에 매달리고 천명을 묻기보다 자기를 내세우는 데만 몰두해온 ‘나잇값 못하는 5·60대’ 탓이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현실에 들붙지 말며 도망치지도 말고, ‘나’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하늘 소리에 귀 기울여야겠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 의미 세계를 그리며, 내가 터한 삶의 바탕 너머 보편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본디 종교 아니던가. 여태껏 내가 지키고 쌓아온 울을 허물어 더 넓은 세계를 품고, 개별의 ‘나’에 머물던 관심을 보편의 ‘우리’로 넓히는, 그리하여 ‘이제, 여기’에서 ‘그 너머’를 살도록 이끄는 것이 종교일진대, 종교야말로 지천명의 열쇠인 성싶다.

 

박규환 숭실대 외래교수·기독교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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