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국가 훈육은 헌법에 따라 행동하도록 국가권력을 단련하는 일이다. 헌법은 국가권력에게 자기 규제 원리에 따라 행동할 것을 명령했다. 입법과 행정 그리고 사법의 권력을 나누고, 그것을 서로 다른 기관에게 나눠줬다. 서로 견제하게 함으로써 어느 한 쪽에 권력이 쏠리지 않도록 명령했다.
아동에게 강제적 통제는 금지이지만, 국가 훈육은 다르다. 국가가 자기 규제를 할 것이라는 기대가 무너진다면, 주권자로서는 그것을 용인할 수 없다. 국민에게 그것은 시민에서 신민으로 추락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 사회에서 저항권을 강조하는 까닭이다.
‘민주화’ 실패감이 크다. 상호 견제해야 할 권력들이 짬짜미 의혹을 살 정도로 그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남기 시민의 사망 사건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해도 소수이거나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정치적 집회와 결사는 가장 원초적인 헌법적 권리로서 최대한 보장받아야 한다.
정치적 구호를 외치면 불법집회라는 식의 규정은 헌법을 통째로 부정하는 일이다. 민주적 통제 없는 권력은 폭력적 자기 방어를 정당화한다. 경찰은 차벽과 물대포 등을 동원한 원천봉쇄와 폭력진압을 손쉽게 택한다. 피해자가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경찰의 물대포 가격을 받은 시민이 사경을 헤매다 죽음에 이르렀다. 의학적인 판단보다도 더 자명한 것은 국가 폭력이었다. “부검의 최대 목적은 억울한 죽음을 찾아내어 침해된 인권을 회복”하는 데 있다. 시민의 죽음 자체가 경찰의 인권 침해를 증명했다.
경찰의 부검 집행은 백남기 농민의 사망 책임을 면하려는 자기 사면의 시도이다. 국가의 자기 규제 원칙에 따르면, 법원은 부검영장을 기각했어야 했다. 유족의 협의를 조건으로 내건 법원의 영장은 경찰의 인권 침해 결정의 자기 책임을 피해자인 유족에게 전가한 것에 불과했다.
법원 본연의 임무인 경찰에 대한 사법 통제를 포기하고 유족 뒤로 숨었다. 유족에게는 부검은 물론 협의 자체가 고인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민주시민도 마찬가지다. 가해자인 국가권력이 자기 사면을 위해 피해자의 시신을 훼손하려는 이차적인 폭력을 막지 못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검을 용인하는 일이 정치적인 죄임을 인식해야 민주시민일 터이다.
부검영장의 헌법적 시한은 이미 종료했다. 25일이라는 날짜는 무의미하다. 경찰이 부검 영장을 재신청하는 일은 집회를 폭력으로써 해산한 것, 부검 영장을 신청한 것에 이은 세 번째의 헌법 범죄다. 이것을 단호히 처리하지 못하는 법원을 상상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끔찍하다.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국가 폭력 앞에서 시민의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동안 ‘민주화’의 세월 동안 무심했던 또는 방관했던 자책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자책을 넘어 각오와 실천이어야 한다. 국가권력이 헌법의 명령에 충실하도록 기초부터 훈육을 시작해야 할 때다.
오동석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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