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불혹, 그리고 지천명

“마흔 살에는 무엇에도 홀리지 않았고(불혹·不惑) 쉰 살에는 하늘의 뜻을 알았다(지천명·知天命)”

 

삶이 참 깔끔하고 정갈하지 않은가. 나도 그럴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불혹이 오고, 지천명이 되겠거니 여겼다. 그래서 마흔쯤 되면 그 무슨 꾐에도 빠지지 않고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바위 같은 사람이 되어 있겠지. 그려 보곤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마흔이고 보니 웬 유혹이 그리도 많던지….

 

확실히 인생의 전반기는 뜻을 품고 다듬고 세우는 과정이다. ‘나’를 세우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시기다. 그 싸움터에서 저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젊은 날을 보내야 했고, 보내고 있다. 

총성만 없지 실제로 전쟁 같은 삶이 아니던가. 그 싸움의 끝자락에서 공자처럼 “더는 어떤 삿된 길(邪道)에도 흔들림이 없다”는 ‘주체 선언’이 나올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으련만 우리네 현실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마흔을 넘기면서, 싸움에서 이겨 전공(戰功)을 세우고 전리품도 웬만큼 획득하면서 인생의 절정기에 이르면 외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내 것’이 많아져 이젠 제법 살만도 한데 여전히 모자라고 무언가 공허하다.

‘정오(正午)의 목마름’이라고나 할까. 그 틈을 비집고 별별 것들이 ‘나’를 넘본다. 술, 놀음, 성(性).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갈증과 허기. 하여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려고 자기를 볶아치는 사이에 ‘나’와 ‘내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내 것’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질 것처럼 여기다가 이윽고 ‘내 것’의 노예가 되고 만다.

 

요즘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키며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저 높은 곳의 40~50대들이 모두 그 짝 아닌가. 어렵다는 ‘고시’를 패스하고 한때는 호기로운 시절도 있었으련만,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돈 되고 힘 될 만한 곳이면 걸신이라도 들린 듯 쫓아다니며 게걸스레 집어삼키다 가시에 걸려 마침내 그 먹은 것을 토해내야 하는 이들. 시샘하고 부러워하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가락질하며 언죽번죽 윤리·도덕을 들먹이는 사람들, ‘불혹’과 멀기는 매한가지다.

 

‘마흔이 불혹’이라는 명제를 우리네 인생살이에 적용할진대 그것은 결코 ‘사실’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 없다. 그것은 차라리 당위이자 지향성이다. 사실로 치자면 인생의 정점이랄 수 있는 40대야말로 되레 ‘불혹 해야’ 할 만큼 유혹이 넘쳐나지 않는가. 

그러므로 불혹이 되려면 성취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에 홀려 애오라지 ‘내 것’에만 매달린 삶, 끊임없이 무엇이 ‘되려’ 하고 무엇을 ‘하려’했던 오랜 삶의 방식을 찬찬히 돌아보며, 참된 ‘나’를 찾아 나서야 한다. ‘정오의 목마름’은 생명으로, 생명답게 살라는 영혼의 갈망일 테니 말이다.

 

살아 내려고, 이기기 위해 써야만 했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밖으로만 향하던 눈길을 안으로, 내면으로 돌릴 일이다.

 

‘내 안에 하늘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천성(天性)이나 불성(佛性) 또는 시천주(侍天主)가 그러하고, 성서의 하느님께서도 “나의 법을 그들 가슴 속에 넣어 주며, 그들 마음 판에 새겨” 두었다고 하셨으니 나의 본성을 찾는 여정이야말로 ‘지천명’의 길이 아닐까. 내 안에서 잠자는 ‘하늘’이 깨어날 때 평화로운 ‘은총의 오후’가 열릴 터이니.

 

박규환 숭실대 기독교역사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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